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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냥해지고싶다 Mar 28. 2024

신뢰의 가장 어두운 그늘: 사기당한 순간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들(3)



 '숨 막히도록 고요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방문한 정신과의 느낌이었다. 대기실에 있는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동안 자주 갔던 소아과나 다른 진료과 와는 아주 달랐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노인들의 앓는 소리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커다란 어항을 뚫어지도록 보는 사람들부터 넋을 빼고 창 밖만 보는 사람들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도서관에 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대기하는 이들은 몇 없었지만,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차례가 왔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향했다. 처음이라서 그럴까? 괜스레 긴장됐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노크를 하고 굳게 닫힌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버지 뻘 정도로 보였다. 머리는 중간중간 희끗희끗했지만 아주 단정한 모습에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말과 사람은 같이 온다고 해야 할까? 단정한 인상만큼 선생님은 따뜻한 목소리로 나에게 무슨 일로 오게 되었냐고 물으셨다.


 생면부지의 사람 앞에서 힘든 마음을 꺼내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기에 더 가슴속에 있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서도 없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뒤죽박죽 꺼냈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도 논리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깨진 어항에서 물이 새어 나오듯 이야기가 입에서 눈에서 몸짓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셨다. 중간중간 이야기가 끊어질 때만 되물어보시며 내 이야기를 이어주시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나 대화를 했을까?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처음 뵙는 선생님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배신당한 마음이 너무 속상하다고, 아내의 기대를 저버려서 너무 미안하다고, 이런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다고.'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내 안에서 썩어버려 묵혀진 온갖 감정들이 활화산처럼 폭발해 분출하였다. 흐느끼고 화를 내다 결국 엎드려서 사탕 뺏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묵은 감정들을 어느 정도 배설하자, 끝없이 나올 것 같던 눈물도 점점 마르기 시작했다. 분명 긴 시간이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셨다. 시간이 촉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시계를 보지도, 이야기가 듣기 싫어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으셨다. 내 안에 쌓인 감정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그저 가만히 기다려주셨다. 그다음에야 나를 곧게 보시며 따스한 눈빛으로 한마디를 해주셨다.


 '큰돈일 텐데 많이 힘드셨겠어요.'


 해결책을 내주는 것도, 인생의 조언을 주신 것도 아니지만 '힘들었겠어요.'라는 이 공감의 한마디가 정말 감사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어느 정도 진정된 것을 확인하시고 나서야, 수면 상태라던가 마음가짐 등을 물어보셨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전혀 잠을 못 자고 있으며, 자더라도 5~6번씩 깬다고.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좁은 공간에 있으면 세상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아지는 기분이라고. 선생님께서는 힘들겠지만 이겨보자며, 우선 몇 가지 약을 먹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반드시 일주일 뒤에 다시 병원으로 오라고 이야기하시며 마무리했다.


 병원을 나오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전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무겁게 나를 옥죄이던 쇠사슬이 조금은 느슨해진 듯하다. 가슴이 조금 가벼워지자,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엎질러진 물이지만 줍지는 못하더라도 닦아는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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