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이 터졌다. 아들은 올 2월에 졸업을 했다. 뭐 하나 똘똘하게 잘하는 거 없는 시원찮은 아들이 멀리 있는 전문대에 입학을 했지만 절대 보내지 않는다. 공부도 안 하는 아들이 등록금으로 돈만 축낼 거라 믿는다. 아들은 부모의 닦달에 공부가 몹시 싫어졌다. 먹는 거 좋아하고 게임만 하는 아들을 친구부부는 한심하게 여겼다. 어제 그 아들은 방에 숨겨놨던 전자담배를 엄마한테 걸렸다. 모른 척 넘어갈 친구가 아니다. 잔소리 대마왕인 친구는 여지없이 한 소리 했다. 공부도 안 하고 일도 구하지 않는,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아들이 방에서 담배까지 피우면서 밤새 게임을 하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감히 부모한테 싸가지없이 말대꾸를 하고 불공하게 군다고 좁쌀은 흥분했다. 아들을 끌고 나갔다.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으니 방을 얻어 준다며 나가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아들은 아비에게 끌려 나갔다.
어제 지인의 아들 친구가 명을 달리했다. 자살을 했다. 이제 스물네 살이다. 지인 아들과 같은 반이었던 아이는 심정지로 작년에 삶을 마감했고 내일이 기일이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이제 청춘을 시작하는 아이들인데 봉오리가 열리기도 전에 삶을 끝냈다. 그 나이는 제대로 시작도 안 해 본 거다. 끝내는 건 사는 것보다 더 힘들 텐데 왜 삶을 내려놓았을까? 무엇이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을까? 그 아이는 무엇을 참을 수 없었을까?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상한 사람은 처음부터 이상한 게 아니다. 친구도 이렇게 별나지 않았다. 이십 대부터 알아 온 친구인데 결혼을 하고 좁쌀영감 등쌀에 늘 얼굴 찌푸리고 살다 보니 점점 더 꼰대가 된다. 성격이 까다롭긴 했어도 이렇게 도덕교과서를 끼고 다니는 애처럼 굴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변해가는지 착잡하다. 아들의 전자담배를 말하는 친구는 이십 대에 담배를 폈었다. 저도 십 년 이상 담배를 피웠는데 아들을 잡도리했다. 결국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네가 아들을 못 믿잖아! 너네 부부는 자식을 너무 무시한다고 버럭 했다. 친구는 아니라고 자기가 뭘 아들을 무시하냐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는 자기 아들이 게임 말고 뭐 하는 게 있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흔이 넘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식을 낳아서 그런가 그 둘은 심하게 자식을 간섭했다. 참견과 지적만이 사랑이었다. 친구는 아들 무시하는 말이 잦았다. 같이 살면 똑같아지나 보다. 친구도 남편한테 오랫동안 괄시를 당했다. 아들 친구들 앞에서도 마누라를 흉보는 좁쌀남편은 제 말이 다 옳은 사람이다. 남편은 성실하지 않은 아들을 깔보고 얕잡아 본다. 친구는 남편과 자주 다투면서도 아들에 대해서만은 의기투합한다. 둘이 똑같다. 아들이 가출하지 않은 게 용하다.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부모랑 씨름하면서 사는 아들이 참 착하다.
예전에 남산에서 공연을 보고 내려오는데 인파로 길이 꽉 막힌 적이 있었다. 남산에서 명동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택시가 인파와 함께 기다시피 했다. 그 택시기사는 나이가 적지 않았는데 사람들 틈에 끼어서 크랙션을 쉴 새 없이 울려댔다. 하도 시끄러워서 빵빵거린다고 투덜댔었는데 그걸 기사가 들은 거다. 나는 택시 바로 옆에서 사람들에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택시기사는 내 말을 듣고 갖은 쌍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년 저년은 욕도 아니었다. 오만 육두문자를 사용하던 그 기사는 점점 더 얼굴이 새파래져서 악을 쓰면서 욕을 했다. 기세등등한 기사의 욕지거리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손님도 난감한 얼굴로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있었다. 나도 다른 데로 옮겨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그 욕을 고스란히 다 먹었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피했어야 했다. 삼십육계 전술 중 줄행랑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는데 난 도망치지 못했다. 명동이 보이고 인파가 몰려나간 후에야 그 욕을 그만 들을 수 있었다.
어려서 책에서 읽었던 좋은 사람들을 별로 마주친 적이 없다. 돌아보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이 천지삐까리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이상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친하다고 선을 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별 걸 다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호의가 점점 누군가의 권리가 되자 내 오지랖은 주제를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안 해도 될 친절을 과하게 베풀어 상대를 당황시킬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쓸데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참견을 하곤 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무덤을 파는 짓을 줄였다. 내 솔직함을 상대가 약점으로 잡고 욕을 하는 것을 듣고 말을 줄이기 시작했다. 내가 호구짓을 해놓고는 호구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관계는 더 힘들어졌다. 마음이 꺼려지는 불편한 사람들을 모두 멀리하다 보니 점점 나의 삶의 반경은 좁아졌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로 분주하지는 않다. 차고 넘치는 자유시간을 누린다. 가끔씩 오는 외로움은 내가 견딜 몫이다.
고자(告子)는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어서 다만 교육하고 수양하기 나름이며 수행과정에서 어느 품성으로도 될 수 있다고 했다. 무협소설을 많이 읽던 때는 수행이란 말도 종종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좀비가 유행인 시대라 그런가 수행이라는 단어도 낯설다. 수행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시대가 아니다. 신경정신과에 가서 감기약 먹듯 우울증 약을 먹는다.
성격 안 변한다고 하는데 살면서 많이 변한다. 삶은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기도 하고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먹고사는 일에 지친 사람이 넉넉한 심성을 갖는 건 쉽지 않다. 악다구니를 쓰며 손해보지 않으려고 달려들곤 한다.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상처를 보듬기 바빠서 칼 같은 말을 던지기도 한다. 살아보니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다. 먹고 살 여유가 있으면 편협하게 굴지 않지만 악착같이 모아서 남들 줄 돈을 떼먹고 부자가 된 사람들은 절대 베풀지 않는다. 부모가 돼서도 변한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자기가 싫어했던 부모의 행동을 고스란히 닮은 모습을 보기도 한다. 젊어서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교과서에서나 등장할 부모의 모습으로 가장을 한다. 청춘의 실수와 실패를 잊었고 열정의 어수룩함을 잊는다. 낯부끄러운 짓을 덮어버리고 아닌 척한다. 솔직하면 손해 보는 줄 안다.
일박이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했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남들이 고통을 겪든 말든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말. 무서운 말이다. 나만 손해보지 않으면 되고 나만 상처 입지 않으면 된단다. 모두가 불행해도 나만 아니면 괜찮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나? 삶이 녹녹하지 않은데 말이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이상한 사람이 된다. 이상한 사람이 된 줄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