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하나 만들어놓고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술 사러. AI가 만든 노래지만 어찌나 술을 부르는지 목금토일 세일하는 맥주 번들을 사러 못 참고 달려 나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신이 난다. 50이 넘어서 신이 나는 일이 드물었는데 노래 만들기는 요래조래 해보면서 히죽히죽 웃게 된다. 내가 주문한 것을 기대이상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주니 꼭 종합예술인이라도 된 것 마냥 우쭐한 기분이 든다.
자랑하고 싶어서 지인에게 내가 만든 노래라고 공유를 했다. 지인은 남편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와인바로 달려가고 싶다고 했다. 아~ 나도 뭐가 꿀찜했는데 그래 술이 당겼던 거야. 당화혈색소가 위험수치를 넘겼다고 욕을 잔뜩 먹고 온 게 며칠 전인데 에라 모르겠다 맥주가 너무 먹고 싶었다. 와인은 아니더라도 이 밤중에 나를 위한 맥주가 없다면 너무 섭섭한 일이다. 맥주를 사다가 급하게 찬물에 씻어서 냉동실에 넣었다. 마침 어제 사둔 고기도 있겠다 급하게 가진 재료를 몽땅 붓고 볶았다. 숨이 쉬어진다.
밥상머리 교육이 반주였다. 아버지는 항상 반주로 포도주를 드셨다. 나는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항상 밥주발 뚜껑을 내밀어 포도주를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납작한 밥주발 뚜껑에 찰랑찰랑하게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부어 주셨다. 아주 꼬맹이 시절에 조금 얻어마셨던 포도주는 달달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는 두꺼비상회로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가끔 저녁 시간에 아버지가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시면 밤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보름달이 무서워서 주전자 뚜껑에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진한 막걸리 맛은 그때 배웠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난 술과 인연이 많았을지 모른다. 4.8킬로의 몸무게로 의사는 엄마를 살리고 나를 포기할지 아버지한테 얘기하기 위해 맥주 한 잔을 사달라고 했단다. 의사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술기운에 힘차게 나를 기계로 뽑아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애가 걸어 나올 거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집에 있던 시바스리갈을 마셨다.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꽉 막히거나 답답하면 모두가 잠든 새벽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따라 마셨다.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졸업여행은 맥주잔치였다. 아이들은 긴장된 시간에서 벗어나서 술을 마셨다. 갑자기 풀어진 해방감에 아이들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셨고 여기저기 취한 흔적을 남겼다. 엄마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걸 뭐라고 나무라지 않았다. 술에 관해서만은 참 관대했다. 동생이 결혼하던 날도 엄마와 나는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함께 끝까지 술자리를 지켰고 그 많은 설거지는 아버지 몫이 됐었다.
대학을 들어가서는 매일 술로 살 때가 있었다. 내 삶이 너무 힘겨웠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동터오는 새벽에 정신이 맑아질 때도 있었다. 어쩔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했었다. 달라진 집안의 분위기와 폭삭 망한 집을 보며 답답했다. 아버지는 술이 술을 부르고 주사가 심해지셨다. 밤새 엄마를 들볶아 한숨도 못 자게 했다. 아버지는 사업의 실패로 가족이 당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악을 쓰고 대들던 나를 향해 아버지는 술병을 던졌다. 유리 파편이 퍼졌고 내 팔목에서는 피가 흘렀다. 딸한테 한 번도 손대지 않던 아버지는 놀라서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국에 탄 술 끊는 약 때문에 놀랐었다. 당신의 해방을 위해 절로 갔던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다. 혹시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없냐고.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술을 죽기 살기로 마셨다. 갑을관계에서 나는 을이었다. 클라이언트를 접대하는 술자리는 전쟁터다. 너 한 번 죽어보라고 공짜술을 머리꼭지가 돌 정도록 마음껏 마시며 덤벼든다. 의뢰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같이 마셔줘야 했다. 공짜인 만큼 술자리는 길어진다. 쉼 없이 건배를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텼다. 술을 핑계로 치근덕거리던 사람은 너무 많다. 내가 술을 이겨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정신이 풀어지더라도 끝까지 나를 붙잡아야 했다. 뒤풀이를 핑계로 마구 마시던 날들의 기억은 즐겁지 않다. 몽롱하게 취해 기분 좋은 흔들림이 아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붙잡고 씨름하던 날들이었다.
임신한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강릉 앞바다에서 새벽 바다를 보면서 취하지 않았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를 시원한 바닷바람에 회를 안주로 하니 술술 들어갔다. 아이는 뱃속에서 소주를 달게 마셨던 모양이다. 태어나서도 술을 좋아했다. 제 아빠가 장난 삼아 부어준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같이 맥주를 마셨다. 치킨을 집으로 배달시키고 생맥주 한 잔을 권했다. 아들은 그 이후에 맥주 한 잔을 안 마시면 섭섭해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나는 동기들에게 아들한테 술 한 잔 주라고 했다가 동기한테 너 미국이면 잡혀간다는 말을 들었다. 여긴 미국도 아니고 술 한 잔 마신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나도 어려서부터 참 꾸준히 마셨다.
아들이 집을 떠나기 직전에 이십여 년 만에 선배를 만나서 정말 십여 년 만에 거하게 취했었다. 이십여 년의 인생을 얘기하려니 복어 안주는 뒷전이었다. 술이 술을 불렀다. 우리의 과거가 안주였다. 화요가 달았다. 결국 아들한테 전화를 했다. 느릿느릿한 아들한테 내가 너무 취해서 도저히 대중교통을 타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내 위치를 아들한테 알려줬다. 아들이 그렇게 빨리 달려올 줄 몰랐다. 음식점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그 언덕을 다 내려오기 전에 차 한 대가 달려왔다. 선배는 혹시 네 아들 아니냐고 했다. 차는 그럴 리가 없다는 내 앞에서 멈췄다. 아들이 선배한테 인사를 하고 나는 차에 타자마자 정신이 흐려졌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마셨던 거다. 아들은 달리고 나는 결국 차 안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다. 밤새 숙취로 시달렸다. 꿀물이 그렇게 당겼던 적은 처음이었다. 화장실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다가 아들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꿀물 두 병을 보았고 정신없이 마셨다. 그리고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차 안에 내가 저질렀던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아침 일찍 차로 갔다. 차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아들 친구들로부터 엄마의 만행을 전해 들었다.
술은 때로 나를 풀어지게 만든다. 술을 부르는 노래를 연속해 듣는다. 자꾸 웃음이 번진다. 살짝 늘어져 나른하게 구름 위에 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