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책바가지

by 송나영

"전화나 빨리 끊으세요!"

낯이 뜨거워졌다. 내가 진상이다.

한밤중에 웬 모터소리가 심하게 들린다.

이주 전 주말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밤중에 떤 적이 있었다. 다음날 앞집과 우리 집이 동시에 그 전날부터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았던 걸 알았다.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버티다가 아무래도 보일러가 고장 난 듯싶어 일요일 한낮에 관리실로 전화를 걸었다. 기전실 기사님이 오셔서 하루 종일 애쓰셨는데 결국 못 고치고 또 하루를 넘겼었다. 부품이 고장 난 거였다. 그 일을 겪어서 그런지 왱왱거리는 모터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밖을 내다봐도 뭐가 달라진 게 없는 거 같고 차 소리 같지도 않았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니 내려갈수록 더 요란하고 시끄럽다. 다른 집들은 아무도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혼자 오르락내리락 분주하게 다니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지난번처럼 며칠을 보일러 이상상태가 될까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걸 알려야만 할 거 같은 사명감이 들었다. 그게 주책의 시작이다.

우리 동만 이렇게 모터 소리가 시끄러운 거냐 이 소리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기전실 기사님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이 오잖아요! 지금 눈 치우느라 그래요. 빨리 전화 끊으세요! 순간 정말 헉하고 입이 다물어졌다. 너무 부끄러워 후다닥 전화를 끊었다. 죄송하다는 말도 못 했다. 베란다에서 밖을 쓱 한 번 훑어봤는데 침침한 내 눈에는 눈이 오는 게 안 보였던 거다. 아뿔싸 1층으로 내려가보니 눈은 펑펑 내리기 시작했고 금세 쌓였다. 제설차는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눈을 치우느라 바빴다. 누구 한 사람 눈을 치우러 나오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아파트도 경비원분들을 줄여서 기전실 기사님과 관리실 직원 몇 분이 천 세대 이상의 단지에 내리는 눈을 감당하고 계신 거다. 그런데 불쑥 전화해서는 우리 동에 무슨 소리가 난다는 한가한 소리나 했으니 전화받으신 분이 성질 안 내신 것만도 다행이다.

요즘 아주 주책을 연달아 떨고 다닌다. 연말에 친한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밥을 맛있게 얻어먹고는 간식까지 옹골지게 챙겨 먹었다. 언니가 건네주는 생강젤리를 씹는데 느낌이 싸하다. 역시 몇 년 전에 고생하며 한 임플란트 이가 쏙 빠졌다. 당황한 나는 욕실에 가서 빠진 이를 닦아서 심어놓은 기둥에 대충 끼워 넣었다. 잘 모르면 그냥 그대로 들고 치과에 가면 될 것을 그걸 굳이 끼워서 떨어지지 않게 꼭꼭 끼운답시고 거즈뭉치까지 이 사이에 꽉 물고 있었다. 치과의사 선생님은 빠진 걸 그대로 끼우면 되는데 왜 이걸 끼워서 부러뜨렸느냐며 혀를 차셨다. 목돈이 또 나간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허술해진다. 한 십 년 전에 앞니가 술술 흘러내렸고 치과에 갔더니 치아 신경에 염증이 심하다고 신경을 모두 끊어줬었다. 벌어진 이가 보기 싫어 고치려다가 또 치아 몇 개를 갈아서 세 개를 끼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하고는 안 한다고 손사래를 쳤었다. 처음에 틀니를 걸겠다고 멀쩡한 이를 뾰족하게 갈아서 고리를 걸 치아로 만들었을 때부터 치아를 가는 건 아주 질색할 노릇이다. 잇몸이 부실하니 이가 멀쩡하지 않다. 이번에 치과에 가서 처음으로 내가 만성치주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안 차트를 그렇게 눈앞에 펼쳐놨는데도 난 이제야 본 거다. 흘러내린 이는 신경이 끊어진 상태라 점점 색이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임플란트를 새로 하는 김에 그 이도 손을 보기로 했다. 마취도 없이 갈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내 신경은 죽어있었다.

앞니에 임시치아를 하고 왔다. 도대체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내 손은 얼마나 치실을 세게 잡아당겼는지 임시치아가 쏙 빠졌다. 일주일 동안만 하는 임시치아라 살살 쓰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생강젤리로 문제를 만들더니 이번에는 크림치즈다. 찐득한 크림치즈에 앞니가 쏙 빠졌고 임플란트 어금니로 바사삭 부숴버렸다. 또 싸한 느낌이 왔다. 임시치아 반쪽은 벌써 뱃속으로 빠진 모양이다. 바로 뱉어 물로 씻었지만 임시치아 반쪽만이 살아남았다. 주책바가지다.

한밤중 눈은 펑펑 내리는데 주책바가지 아줌마의 헛소리에 짜증 나셨을 분께 미안함이 가시지 않는다. 나이 먹을수록 생각이 짧아지는 건지 삶이 나를 재촉하게 만드는 건지 이젠 주책바가지 할망구가 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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