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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Apr 03. 2024

  환갑의 나이에 내 인생 모든 걸 걸었다는 말에 혹 해서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를 소개하는 영상을 봤다. 내용보다 아네트 베닝과 조디 포스터의 나이 든 모습에 눈길이 갔다. 러브 어페어에서 아름다웠던 아네트 베닝은 짜증 많은 노인네로, 양들의 침묵에 나온 이지적이고 새초롬한 조디 포스터는 씩씩한 할머니로 나온다. 그들이 할머니라는 사실이 놀랍고 그 세월을 못 느끼는 내가 더 놀랍다. 두 할머니를 보려고 영화를 봤다.

  만사에 우울해. 나이애드는 사는 게 시들해진 우울한 노인네다. 내가 달리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쓸 것인가? 사는 게 지겨웠던 나이애드는 나이 60에 실패했던 도전을 다시 한다. 마라톤 수영선수였던 그녀는 28세에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수영으로 도전했었다. 매일 훈련을 하고 팀을 만든다. 친구 보니의 도움으로 무려 네 번의 실패를 딛고 다섯 번째 도전에 성공하게 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이애드는 결국 해낸다 예순네 살의 나이에 장장 177km의 대장정을 52시간 54분 동안 수영으로.

  가냘프고 여성스러운 아네트 베닝이 걸걸한 목소리의 나이애드로 나오고 차분한 모습으로 기억하는 조디 포스터는 명랑하고 배려심 많은 할머니로 등장한다. 그네들의 뱃살 하나 없이 튼튼한 근육질 몸매에도 불구하고 얼굴과 목과 팔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모습이다. 보톡스나 필러의 도움 없이 주름하나 손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다. 저 역할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두 배우는 실제 인물인 나이애드 이상으로 열정적인 힘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이순재, 백일섭, 박근형 세 분이 출연하는 연극을 봤다. 이순재 님의 발성이나 호흡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연극대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연극이 끝나고 그분의 노고에 울컥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벌떡 일어서서 환호를 보내고 싶었다. 노인들의 열정에 자꾸 늘어지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꿈이 없었다. 하루하루 뒹굴거리는 게 일이었고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을 뛰어다니다 보면 하루 해가 저물었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서점을 들락거리는 취미가 생겼고 이 책 저 책 뒤적거렸다. 어느 날 내 손에 들어온 사이언스를 보고 문득 꿈이 생겼다. 입자가속기에 대한 기사였다. 하나도 모르겠는데 무슨 뜻인지 꼭 알아보고 싶었다. 소립자를 연구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진로를 정했다. 내 꿈을 위해 많은 시간을 책상에 앉아 보냈지만 고2 때 수학여행으로 무리하게 토함산 산행을 한 뒤에 허리디스크가 재발해 다리를 절었다. 허리 수술을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엄마의 판단에 따라 한의원부터 척추교정, 지압까지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했다. 허리가 아프면 나이롱환자가 된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힘도 없고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오랜 병치레에 의욕이 다 떨어졌다. 원하는 대학은 멀어졌지만 소립자에 대한 꿈은 여전했다. 너무 사랑하면 제대로 못하는 거 같다. 소립자 연구에 대한 나의 열망은 마음뿐이지 당장 용돈이 급했다. 과외를 몇 개씩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벌어야 했다. 입자 가속기는 미국과 프랑스에 있는데 점점 멀어져 갔고 나는 꿈을 접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한 번뿐인 삶을 멋지게 살고 싶은데 도대체 무얼 해야 하는지 밤마다 뒤척였다. 꿈을 향해 돌진했던 사춘기 시절에는 고민이 없었는데 목표가 사라지니까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무얼 해야 맞는지 방황하기 시작했다. 교보에 가서 여러 책을 찾기 시작했다. 적성검사 책을 사고, 직업에 대한 책을 찾았다. 나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운명에 대한 책도 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봤지만 마음에도 없이 그냥 써낸 걸 아는지 다 거절당했다. 미술 잡지사를 스쳤던 것도 같다. 잡지사 기자라는 직업은 나와 너무 안 맞아서 바로 나왔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편집장의 파리 유학시절 얘기만 기억에 남아있다. 우연히 잡은 책에서 방송작가에 대한 글을 접했다. 이건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전화를 걸어 언제 교육원에서 작가지망생을 뽑는지 알아봤다. 명예욕에 몸 달아있던 나는 인간군상에 대한 글을 써서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드라마 작가를 하려고 몇 년의 연수 과정을 거쳤다. 공모전에서 몇 번의 탈락을 했고 비디오 영상물에 대한 일을 시작으로 방송일을 거꾸로 배웠다. 서너 개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몸이 탈진 상태로 망가질 때까지 일을 했다. 방송이 나가고 끝냈다는 짜릿한 희열감은 점점 옅어졌다.

  아이를 키우며 동화를 쓰고 싶었지만 밥벌이가 급했다. 아이 친구들을 모아 시작한 독서교사는 살림에 도움이 됐다. 자식을 키우는 동안에 돈이 목표가 됐고 내 꿈을 챙기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지겨운 줄도 모르고 매일 쳇바퀴 돌 듯 살았다. 아들이 진학하고 군대도 다녀오며 집을 떠나게 되자 삶이 헐렁해졌고 나는 시간이 남아 어쩔 줄을 모른다. 나이애드처럼 만사가 다 우울했다. 내 인생을 살아야지. 내 꿈을 찾아야겠다고 문득문득 생각하지만 마음이 늙고 몸이 늙어서 다 귀찮아졌다. 몇 년 전에 읽었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델리아 오언스의 첫 소설이다. 나이 70에 첫 소설이라니! 나도 그 길을 가고 싶었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서 사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버린 것 같다. 70의 나이가 소설에 담겨있었다. 동물행동학자로 오랜 시간 연구했던 그녀의 인생이 소설에 있었다. 내 마지막 꿈으로 소설을 쓰겠다고 십여 년 전부터 벼르고 살았는데 막상 쓸 시간이 넘치게 많아지자 내가 늘어져버렸다. 열심히 읽던 책도 손 놓은 지 오래고 일주일에 서너 편 이상 보던 영화도 보지 않는다. 예술 영화 찾아서 돌아다니던 일도 관뒀다. 재미있다고 주변에서 추천해 주는 드라마는 그 많은 횟수에 지레 지쳐 쳐다보지도 않는다. 다 시들해져 버렸다.

   다시 꿈을 꾼다. 무엇을 쓸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쓰고 싶다는 것만 분명하다. 내 게으름과 우울이 나를 붙잡는 게 문제다. 몸에 익은 습관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나이애드의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 방황하는 내 꿈을 붙잡아 줬다. 천천히 내 나이에 맞게 출발 준비를 해야겠다. 나는 지금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는 길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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