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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Apr 16. 2024

부모 교육

  결혼하자마자 부모가 됐던 나는 이론과 현실에서 허우적거렸다. 부모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또 두려웠다. 내 부모를 떠올렸고 육아책과 심리학책, 뉴스위크에 나온 글로 배웠다.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부모가 성장한 때와 자식이 자라는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는 세상은 AI가 등장했고 내가 자랐던 8비트 컴퓨터의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두렵다. 내 못난 모습 그대로 자식에게 투영됐다. 정말 미워했던 부모의 모습 그대로 자식에게 했다. 엄마가 친구의 자녀들과 비교할 때마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결심했건만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삶이 힘에 겨울수록 나는 더 악을 썼다. 동네 창피한 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애들한테 욕을 퍼부었다.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악을 쓰고 흥분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직 어린애들인데 왜 그렇게 나는 여유가 없었을까? 그래야만 한다고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왜 맞췄을까? 아니면 좀 어때? 느리면 좀 어때? 거짓말 좀 하면 어때? 왜 그게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을까?

  큰 애는 8살 때 나랑 만났다. 아이는 거짓말이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고 그 거짓이 나쁜 것인 줄도 몰랐다.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호되게 매를 들었다. 거짓은 반복됐고 체벌은 별반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밥 먹이기는 아주 고역이었다. 먹기 싫으면 먹기 싫다고 하면 되는데 새엄마인 나를 두려워했고 그냥 밥상에 한 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었다. 밥을 물고서. 내가 모르는 환경에서 자란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는 서로 익숙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굶겨봐라 그럼 밥을 먹는다는 말에 하루를 굶겨봤다. 담임은 우리 엄마는 밥을 안 준다고 아이가 그랬다고 전해줬다. 다른 애들과 달랐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달랐다. 새엄마가 생겼다는 소리에 친엄마는 애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와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줬다. 아이는 신나게 따라갔다. 다시 학교에 찾아온 친엄마는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애 어디 있냐고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애를 잡아끌고 누구랑 살 거냐고 다른 친구들 있는 데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 이후로 아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병원에서 몇 시간에 걸쳐 검사를 했다. 아이는 ADHD를 앓고 있었다. 어려서 부모에게 학대받은 것도 있었다. 애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당연히 벅찼다. 늘 텅 빈 눈으로 텔레비전에 몰두하고 있었던 아이, 조부모는 애가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의사는 산만하기 때문에 하루종일 티브에 몰두한다고 했다. 머릿속이 산만한 조용한 ADHD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려고 애가 제일 좋아하는 에버랜드를 밥 먹듯이 갔다. 한 겨울 추위에 어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는 오만 짜증을 내면서 아이가 노는 것을 지켜봤다. 에버랜드에 지쳐갔다. 너만 즐겁지 않냐고 애한테 잔소리를 퍼부었다. 공부는 하기 싫어했고, 학원 원장에게 출석을 확인하는 전화를 하는데도 내 앞에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그날로 학원을 끊었다. 매사에 무기력한 아이를 보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이다.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주얼리공예를 하러 용인에서 일산까지 극성을 떨고 다녔다. 주의력결핍인 아이는 늘 갈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수업을 끝내고 나오면 아이는 집에 갈 생각도 뒷전이었다. 가고 오는 내내 나는 차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하고 싶은 게 맞냐? 왜 늦게 나오냐? 차는 막히고 두 시간이 넘도록 긴 여정을 길에서 보내며 온갖 짜증을 부렸다. 아이들이 나한테 질릴 때쯤 나는 부모교육을 받으러 갔다.

  아이들은 원하지도 않는데 일출을 보자고, 명승지를 보자고 전국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아이들은 SUV 뒷자리의 불편함을 참고 장거리 여행을 다녔고 앞 좌석에 탄 부모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이들은 그 여행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고 했다. 돈 들여서 고생만 했던 여행이란다. 나도 그랬다. 굳이 그 먼 길을 갈 이유가 없었다. 공예하는 곳을 동네에서 찾으면 되고 만약 없다면 그냥 재료나 사다 주고 놀라고 해도 될 일이었다. 애를 쓰고 굳이 힘들게 해 주고는 성질을 부렸다. 안 해주고 차라리 아이를 편하게 내버려 두었으면 더 좋았을 거다. 내 자식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의 자식인데 오죽하랴 싶어서 아이의 성향을 알아보는 테스트도 해봤다. 아이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달나라에 살았다. 큰 애에게 부모로서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나 혼자 시달린 결과 내 아들은 엄마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아들은 눈치를 살폈다. 애들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갓난아이와 초등학생을 데리고 나는 점점 악에 받쳐갔다. 아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의 악다구리 속에 살았다.

  엄마, 하나도 안 보고 싶어요. 엄마 나 엄마 하나도 안 보고 싶어요. 아들은 세 살 즈음 같이 수영장에 다니는 친구네서 하루를 잤다. 엄마의 악다구리에 지치고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에 지쳤었나 보다. 친구 엄마가 "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잘래"라는 말에 바로 갔다. 그리고 씩씩하게 엄마는 하나도 안 보고 싶다고 친구 엄마의 전화로 알려줬다.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일어나지도 않고 밥도 안 먹는 큰 아이를 학교 보내는 일에 온 기운을 다 쓰다가 지쳐서 아침부터 누워있기 일쑤였다. 기어 다니는 어린 아들은 놀자고 보채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 혼자 놀기 시작했다. 남의 자식 키운다고 내 자식은 뒷전으로, 지친 몸과 영혼으로 제대로 해주는 게 없어서 유아수영을 다니고 문화센터를 다녔다. 집에서는 펴지지 않는 얼굴로 억지로 놀 수가 없었다. 마음에 여유란 게 없었다. 내 삶에 여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잘 때마다 찌푸려진 얼굴이 펴지는 걸 느끼며 내가 하루종일 이렇게 인상을 쓰고 살았는 지를 알았다. 인상 쓴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들도 고역이었을 거다. 아들은 나를 보고 웃지 않았다. 내가 웃지 않고 늘 인상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크면서 나는 지독한 엄마의 잔소리를 똑같이 했다. 제대로 자식을 알지도 못하면서 질책하는 소리들, 상처를 주는 말을 했다. 자식을 낳았다고 저절로 부모가 되는 게 아닌데, 내 부모의 못난 점을 고스란히 닮기도 하고, 그 못난 점이 싫어서 안 하려고 기를 쓰기도 한다. 제대로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다. 부모가 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식을 사랑할 줄 알고, 배우자를 사랑할 줄 알고, 친구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쉽지 않다. 감정에 쉽게 흥분되고 동요되니까 집착과 구분하여야 하고 어리석은 미련을 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내 마음밭이 넓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 내 삶에 여유가 있어야 사랑도 사랑으로 보인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다. 내가 준 상처가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사랑할 줄 몰라서, 잘 배우지 못해서,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늘 미안하다.

  아이들 소중한 줄 몰랐다고 아는 지인이 그랬다. 세월호로 꽃 같은 아이들이, 말 잘 듣는 아이들이 허망하게 사라져 갔다. 그 부모의 심정을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겪지 못한 것을 감히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모는 미국에서 아들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마약이 문제였다. 첫 번째 마약 문제로 감옥에 갔을 때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많은 돈을 썼다. 또다시 마약으로 아들이 감옥에 가게 됐을 때 미국인인 이모부와 대판 싸웠다고 했다. 냉정한 이모부와 달리 이모는 한국엄마였고 끝까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번 돈을 모두 보석금으로 쏟아부었다. 이모가 그랬다. 숨이 안 쉬어진다고. 자식이 속을 썩이면 숨이 안 쉬어진다고 했다. 지난봄에 이모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물었다. 왜 마약을 하게 됐냐는 말에 이모는 좋은 학교 보내서 그렇다고 했다. 아들이라 사립학교에 보냈고 돈 많은 집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약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모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모른다. 약을 끊은 아들은 분노 조절이 잘 안 돼서 가끔 이모집에 와서 행패를 부렸다. 이모는 아들한테 맞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고 경찰에 신고했었다. 집을 구해주고, 생활비를 대주고, 차 할부금을 대주는 생활이 얼마 전에 끝났다. 이모는 70이 넘도록 일을 하면서 아들을 위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제 이모는 자신을 위해 돈을 번다. 몇 년 전에 드디어 아들은 제대로 된 직업을 구했고 이제야 그 아들도 자기 자식을 위해 생활비를 벌고 부모노릇을 하고 있다.

  안간힘을 쓰며 여기까지 살았다. 아이들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가 쉽지 않았듯 그들도 벽에 부딪히며 싸우고 있을 것이다. 경쟁도 심하고 더욱 치열해진 우리 사회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더라도 다시 추스르면서 내일을 살고자 일어설 것이다. 질책하지 말고 지켜봐 주고 믿어줄 일이다. 혹독한 시선은 악랄한 독종을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식을 짐짝처럼 여기고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부모도 많다. 신문에서는 패륜 자식은 다루지만 짐승 같은 부모는 다루지 않는다. 아니 요즘 들어서야 자식을 성폭행하는 아비에 대한 기사가 종종 신문에 실린다. 짐승만도 못한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부모다운 부모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 부모 교육도 못 받은 채 부모가 돼서 고달픈 인생을 낳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부모일수록 유교의 '효'만을 부여잡고 산다. 감히 자식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어떻게 자식을 저렇게 대하는 지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아들 친구가 느닷없이 나한테 관심 준 적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9살밖에 안 된 아이 마음에 맺힌 말이었다. 돈 벌기 바빴던 부모의 방임으로 하루 종일 동네를 배회했던 아이는 친구 집에서 홀대를 당했던 적이 많았던 거 같다. 사랑받지 못한 자식은 다른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 일쑤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결국 멀리 할머니댁으로 들어간 그 아이는 외로움을 못 이겨 아들을 찾아오곤 했다. 그 발길이 끊기고 게임 속에서 친구를 찾아 헤매던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부모의 지지를 못 받은 인생이라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씩씩하게 나아갈 일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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