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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May 23. 2024

주제넘은 짓

  입이 근질근질하다. 메타인지가 어쩌고 저쩌고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이들이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본성이 있는데 공부가 다가 아닌데 성적으로만 아이의 능력을 판단한다.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부모에게 모자란 아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참 희한한 건 아이가 공부하는 것과 멀수록 엄마는 아이의 공부에 집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 사칙연산을 모르고 문장을 제대로 쓸 줄도 몰랐다. 학원을 한 번도 쉰 적이 없다고 했다. 논술학원과 수학학원을 꾸준히 다녔다고 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학원을 안 간다고 버팅긴 적도 없었다. X축과 Y축을 모르고 음수와 양수의 구분조차 안 되는데 어떻게 중등 수학을 했는지 모르겠다. 고등 수업을 받기에 기본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눈치로 적당히 답을 찍었다. 중간보다 약간 아래인 성적을 받았다. 기가 막힌 아이의 현실과 다르게 엄마의 희망은 높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랐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이름 있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희망 고문이 따로 없다. 아이는 하기 싫어 억지로 하는, 간신히 바닥을 면하는 성적인데 엄마의 기대는 꺾일 줄 모른다. 엄마의 현실을 벗어난 희망은 아이가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노력하는 것은 싫은데 이상은 높아서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의 성적보다 높은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이 많다.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데 못 간 것이 된다. 더 좋은 대학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공부하기는 싫은데 이름 있는 대학은 다니고 싶다.

  아이가 순하고 착했다. 남들한테 싫은 소리를 할 줄도 모르고 못되게 구는 아이들과 맞서 싸울 줄도 몰랐다. 어색하고 쑥스러우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아이는 공부 잘하고 기센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 화장실에 갇힌 겁 많은 아이는 공포에 질렸다. 화장실에 가둔 아이들의 부모는 학교 운영위원회와 학부모회 임원들이었다. 매일 아이는 놀림을 당했고 학교가 두려웠다. 아이는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담임한테 했다. 아이의 엄마는 학교에 불려 갔다. 담임은 아이가 문제라고 했다. 악의가 다분한 장난에 시달렸던 아이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담임은 아이가 아주 이상하다며 자기가 혼내는데 웃는다고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유했다. 담임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다. 화장실에 갇혔던 아이는 혼을 내고 화장실에 가둔 아이들은 두둔했다. 그 아이들은 그럴 애들이 아니라고 했다. 웃음이 많은 아이는 위험한 아이가 되어 상담을 받아야 했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아이는 주말이면 부모와 함께 전 과목을 공부해야만 했다. 엄마의 기대치와 아이의 성적은 정반대로 향했다. 부모는 신경정신과에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주의력 결핍 약을 먹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는 주의력 결핍 장애 진단을 받은 적이 없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주의력 결핍 약을 먹었다. 아이는 심장이 아프다고 했다.

  성적으로 아이를 평가한다. 아이가 가진 능력과 에너지가 어느 방향을 향해 가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는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잘 나야 하고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얻을 것을 빨리 찾아줘야 하는 것이다. 순하고 착한 것은 능력이 아니다.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이다. 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한 걸음 물러나서 좌충우돌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공부에 대한 로드맵을 빨리 짜서 아이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계획할 줄 모른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도 없다. 어떤 부모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관리자가 돼서 명문대학을 보내기 위해서 아이와 한 몸으로 움직인다. 시험 기간에는 좋은 내신성적을 얻기 위해 무슨 과목을 어느 시간에 공부해야 하는지도 부모가 계획표를 짜준다. 부모가 짜놓은 계획을 따라가기에도 시간은 촉박하다. 대학에서 시간표를 짜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십여 년 전에 들었다. 그 말에 기겁을 했었는데 요즘에는 엄마가 우리 애가 아파서 오늘 회사에 나갈 수 없다고 전화한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부모가 아이의 대입에 필요한 세특이나 비교과를 열심히 해주면 아이는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높아진다. 자소서가 작년부터 없어져 다행이지만 이전에는 고3 여름방학에 부모가 대입 자소서 써주느라 힘들었다는 집이 한 두 집이 아니다. 자소서를 돈 주고 맡기거나 잘난 부모들은 자기가 직접 대필해 주는 것이다. 부모의 능력이 안 되거나 정보력이 떨어지면 대입이라는 레이스에서 밀려나는 건 당연한 일이 됐다. 조부모가 키우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자신의 능력으로 좋은 대학을 얼마든지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정시가 아닌 수시는 힘든 상황이 됐다. 정보싸움에서, 경제력과 사교육에서도 경쟁력을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아이에 대한 무한한 경제적 지원과 학습을 지도하는 깊숙한 개입 없이 내 아이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마음만으로는 아이에게 무리한 기대라는 짐이 될 것이다.

  아이 수준을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주제넘은 짓이다. 꿈을 꾸는 엄마에게 현실을 냉정하게 난도질하듯 말하는 건 상처를 주는 것이다. 아무리 아이가 공부 말고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도 공부를 통해 세상을 열 수 있다고 믿는 엄마에게 들리지 않는다. 아이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할 일인데 부모도 남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스스로 깨닫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그런가? 더 오래 사는 시대인데 여유는 사라지고 더 조급하게 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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