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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Jul 11. 2024

감사

  가끔 내가 누리는 평화를 잊고 살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이 순간에 감사할 줄 모를 때가 많다. 감사는커녕 오늘의 평화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신문을 펼쳐 들면 오늘도 어김없이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여자 친구의 배신에 분노를 참지 못한 젊은 청년이 살인을 저질렀다 한다. 그만 만나자는 말에, 교제를 반대한다는 말에 살인이 일어난다. 그 말이 죽음을 각오하고 할 말인가? 살다 보면 그만 만날 수도 있고, 가족도 좋았다 싫었다 하는데 어떻게 좋기만을 바랄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지 기가 막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끝날 줄 모른다. 겪어보지도 못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채 백 년이 안 된다. 어제 신문에는 한국에서 날린 풍선에 담긴 USB로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북한 중학생 30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릴 때가 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에 안도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북한의 실상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북한 외교관을 감시하고 혹시 도망갈까 봐 북으로 데려갈 때는 다리를 꺾어 깁스를 한다고 한다. 외교관이라는 신분에도 앵벌이 신세라 북한에서 해외에 외화벌이 목적으로 만든 북한식당에서 돈을 구걸하고 밥을 얻어먹는다고 했다. 어느 외교관은 탈출하다 붙잡혔는데 죽음보다 북송을 더 두려워했다. 그들의 목숨을 건 탈출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현실이 더 현실일지 모르겠다. 내가 누리는 이 평화가 오히려 더 비현실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하루만이라도 평화를 누리길 바랐다. 당최 하루가 편안한 날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한 가정에 일어나는 일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전쟁을 치르고 살았다. 처음에는 시댁식구들과 같이 살았다. 몇 개월이 지나 시부모가 분가를 하면서 나는 그들이 남긴 어수선한 짐 속에서 남편과 매일 전쟁을 벌였다. 살림이 많으니 아무것도 해오지 말래서 아무것도 안 한 나는 시부모가 오랫동안 사용한 가전제품과 가구를 물려받았다. 이사 갈 때 이사전문 업체를 부르지 않고 가족이 몽땅 나르는 현장을 처음 봤다. 시모는 집을 고르라고 했다. 주택에 살 건지, 아파트에 살 건지 말이다. 주택을 골랐고 그래서 나는 새 아파트에 새 살림으로 가득 채우느라 신이 난 시모의 모습을 지켜봤다. 욕실 바닥에 콩자갈을 한다고 자랑을 하고, 안방에 새로 짜 맞춘 붙박이장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딸아이를 통해 새 냉장고와 새 세탁기가 있다고 할머니가 자랑하며 같이 살자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시모가 남기고 간 골드스타 냉장고를 비교하며 비까 번쩍한 새 냉장고를 손녀에게 같이 살자는 구실로 삼았다. 7살까지 키웠는데 딸은 절대 할머니와 함께 살지 않겠다고 했으니 섭섭할 만도 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오래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사는 갔는데 아무도 집을 치우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시모가 방구석구석 숨겨놓았던 홈쇼핑의 흔적들도 다 내가 치울 몫이었다. 만삭이었던 나 혼자 이층, 삼층을 오르내리며 먼지구덩이와 씨름했다.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일 뿐이었다. 저녁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남편은 시모와 싸웠고 시모의 불똥은 내게로 돌아왔다. 집에서 빈들거리고 놀던 시누이도 집을 치운다는 생각은 할 줄 몰랐다. 문짝도 없는 다 떨어진 장을 시외숙모가 안 쓰면 달라고 했다. 안방에 있는 멀쩡한 장을 가져가시라고 했다. 시모는 펄쩍 뛰었다. 며칠 후 안방 장은 비싸게 산 거라고 그걸 잘 닦아 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직 삼십 대인 나는 육십 대 취향의 가구를 반들반들하게 닦아가며 이뻐하기 싫었다.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살았다. 좁은 집에서 돌아서면 남의 편 등짝을 일 년 중 겨울과 여름 두 달 정도를 제외하고 지켜봐야 했고 불타오르는 속을 달랠 길 없어 밖으로 돌았다. 가족의 평화는 명절에 알 수 있다. 속 시끄러운 집은 명절이 당최 편안하지 않다. 잘했네 못했네 시시비비 따질 일이 많고 말도 안 되는 집안 어른 꼰대짓에 애꿎게 싸움이 벌어진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은 꼭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남의 집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식의 평가가 이어지고 명절의 저녁은 싸늘한 공기와 오늘도 무사히를 읊조리는 아이들의 숨죽인 소리로 지나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부모의 잔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평화롭다. 이 평화로움을 모르고 살다가 가끔 놀란다. 나의 얼굴이 어느새 펴진 줄도 몰랐고 큰소리 내지 않은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는 걸 가끔 느낀다. 남의 편이 언제 돌변할지 몰라 불안에 떨던 마음도 잊은 지 오래다. 내가 저 손에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데이트 폭력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기사를 접하면 남일 같지 않았는데 그게 기억이 됐다.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불안에 떨던 시간이 지났다. 내가 살았던 시간 동안 많은 전쟁과 폭동을 전해 들었다. 포틀랜드 전쟁, 이라크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시 상황은 수시로 들려오고 있지만 다행히도 아직 휴전이 이어진 상황에서 나는 살고 있다. 감사하다. 평화를 누리는 이 순간을 기쁘게 감사히 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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