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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Jun 12. 2024

골목길

  금호동 골목길이 그립다. 아직도 우리 집이 그대로 있을까 궁금해서 네이버 지도로 골목길을 따라 간 적도 있다.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기억을 따라 골목골목을 찾아보았다. 우리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골목의 두꺼비 상회는 아직도 그대로일까? 오성약국 앞 큰 도로는 무척 좁아 보였다.

  금호동은 오르락내리락했던 언덕을 따라 골목길이 무수히 가지를 뻗은 동네였다. 오성약국 옆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두꺼비상회가 길 한복판에 있었다. 금남시장으로 내려가는 길과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납작한 한옥이 두꺼비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다녔던 곳이다. 양은주전자를 들고 두꺼비상회에 가면 커다란 피리를 옆으로 불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큰 통에서 막걸리를 퍼서 주전자에 한가득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담아주셨다. 노을이 골목에 퍼질 무렵이면 두꺼비 상회 할아버지의 대금소리가 멋들어지게 울려 퍼지곤 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좋았던 대의원 집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면 크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우리 집은 대문 위로 등나무가 있었다. 보라색 꽃을 피우던 등나무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노는 내 등쌀에 어느 해는 꽃 하나 피우지 않았다. 그 당시 흔했던 ㄱ자 모양의 한옥형태였는데 놀 공간이 요기조기 많았다. 부뚜막이 있던 재래식 부엌 위로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문이 있었다. 폭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보물창고 다락이었다. 하루 종일 뒤적거리며 놀만한 오만가지 물건들과 아주 오래된, 한자가 가득한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책들이 있었다. 마당 뒤로 돌아가면 장독대가 있었고 거기서 뒷집이 다 들여다 보였다. 뒷집 언니와 놀려면 장독대에서 부르면 됐다. 장독대 옆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 아궁이에 신문지며 나무며 별거를 다 넣고 불장난을 했다. 어머니의 실크블라우스를 여기서 태워서 두들겨 맞았다는데 기억에서 사라졌다. 작은 방 옆에 있던 푸세식 재래 화장실은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공간이다. 왜 그 당시에는 화장실에 작은 빨간색 등을 켜뒀을까 무섭게 말이다. 밝은 대낮에만 화장실을 갔다. 흙마당은 어느 순간 채송화가 늘 피어있던 작은 꽃밭을 제외하고 시멘트로 몽땅 발라졌다.

  골목길에 늘 아이들이 몰려다녔다. 딱지치기를 하기도 하고 땅따먹기, 구슬치기, 고무줄을 하느라 동네 아이들로 벅적거렸다. 맞은편에 사는 아이는 뇌성마비 지체장애인이었는데 할머니와 골목길에서 함께 했다. 작은 구멍가게 앞에 펴놓은 돗자리에서 동네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신나는 얼굴로 구경했다. 여름날 아이들이 골목길을 누비며 놀다가 모두 돌아가면 그제야 골목이 조용해졌다. 그 골목길에 소독차라도 오는 날이면 아주 난리가 난다. 그 뿌연 연기를 얼굴을 들이밀고 쫓아다니느라 아이들은 연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 언젠가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랗던 아이가 동네에 나타났을 때도 소독차가 올 때만큼 쫓아다니느라 난리가 났다.

  동네 대장 노릇하던 아이가 나한테 욕을 했던 적이 있다. 똑같이 맞받아서 같은 욕을 해주고 나는 달아났고 그 아이는 나를 쫓아오다가 내가 돌아서는 순간 나에게 돌을 던졌다. 내가 맞을 줄 모르고 던진 돌이었다. 짱돌에 맞았는데 희한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어라? 괜찮은데. 깔깔 웃으면서 집에 들어가는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사색이 되어갔다. 집에 들어갔더니 일하던 언니가 나보고 누가 이랬냐고 이마에 빵꾸가 났다는 것이다. 거울을 봤더니 오른쪽 이마에 빵꾸가 났다. 피는 별로 안 나는데 빵꾸가 났다. 언니는 엄마를 대신해서 그 집에 따지러 갔다. 그 집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 머리를 꼬매러 갔다.

  동네 대장인 아이와 나는 동시에 같은 병원을 다녔다. 나는 머리 꼬맨 실밥을 풀러 갔고 그 아이는 축구를 하다 담장 너머로 넘어간 공을 찾으려고 학교 담을 뛰어넘다가 개를 밟는 바람에 개한테 되게 물렸다고 했다. 허벅지에 된장을 한가득 발라서 둘둘 싸매고는 병원으로 왔다. 우리는 사이좋게 그 아이 엄마와 우리 엄마 넷이 함께 그 골목길로 돌아왔다.

  가끔 서울의 골목길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때의 골목길이 아니다. 길도 넓어졌고 떠들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가 없다. 와글와글 시끌벅적했던 그 골목길은 따뜻했다. 함께 했던 그 아이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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