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나영 Jul 30. 2024

남 보다 못한 엄마

    아프다. 남들한테 듣는 거친 말보다 가족이 하는 모진 말은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아들을 독립시키고 생각했다. 내가 일찍 독립을 했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서른 중반이 넘도록 부모와 함께 살았다. 엄마와의 싸움에 지쳐갈 무렵 난 뻔뻔하게 결혼할 자금으로 독립시켜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제적 독립이 안 된 상태가 문제였다.

  이십 대 치열하게 고민하고 버텨봐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신기루만 같았고 밥벌이를 위한 학원 강사 직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엄마가 아프면서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대학원 진학시험에 매달리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진학을 접기로 하면서 나는 사춘기 시절에도 안 하던 방황을 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안 보이는 고민에 답답했다. 밤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나만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을 살까 봐 초조함에 떨었다. 새벽 도매업을 하는 엄마는 밤잠도 안 자고 일에 매달렸기에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다. 사업 실패로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는 아버지를 보며 더 두려웠다. 학교 다니면서 용돈과 학비를 해결한다고 시작한 과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로 이어졌다.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는 학원 강사의 생활이 늘 공허하기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용돈을 받아쓰다 보니 엄마의 눈초리와 잔소리가 껄끄러워 마지못해 했던 일이었기에 거기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누구는 어디 다닌다는 엄마 친구의 딸과 아들들의 얘기를 주말뉴스처럼 전해 들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번듯한 직업을 못 갖고 학원 강사일을 하거나 노는 딸이 못마땅한 엄마는 스무 살까지는 부모의 책임이지만 이제는 네가 부모한테 갖다 줘야 한다며 압박을 했다. 다른 집은 애들이 월급을 받아서 얼마를 준다더라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내가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를 대놓고 원했다. 백화점에 잠옷이나 여성 속옷을 납품하던 일을 하다가 엄마는 빚 대신 가계를 받았다. 도매업을 시작한 엄마는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노골적으로 날카롭게 나의 무능함을 지적했다.

  머플러와 액세서리 도매업을 같이 하자고 했다.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당신 체면에 대학씩이나 나온 자식이 도매시장에서 같이 장사를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새벽시간에 도와주기로 하면서 엄마와 같이 장사를 했지만 엄마는 애가 도와주러 나왔다고 꾸준히 주변에 알렸다. 공부만 한 애라서 뭘 잘 모른다고 이웃 가게분들에게 모범생 딸이 착하게 엄마를 도와주러 나왔다고 선전했다. 엄마는 내가 남들한테 자랑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직업으로 많은 돈을 받아 당신에게 얼마를 상납하기를 꾸준히 바랐다. 같이 머플러로 무역을 하자고 엄마에게 제안했지만 네가 그러다 말겠지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나름대로 머플러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지만 네가 뭘 아냐고 촌스럽다고 무시당했다. 결국 내가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엄마와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은 바빌론 탑을 쌓는 일이다.

  매일 종로 교보문고에 출근 도장을 찍던 나는 어느 날 스크립터라는 직업을 만났다. 방송작가, 오랜만에 설레는 단어였다. 바로 방송작가교육원에 전화를 했다. 어차피 떨어질 거라면 김수현선생님께 면접이나 보고 떨어지리라 당당하게 작가 앞으로 갔다. 내 지나온 세월을 주저리주저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들었다.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으시고 다 들어주셔서 옆자리에서 면접 보던 사람이 바뀌는데도 눈치도 없이 할 말을 다 했다. 그리고 작가 교육원을 삼 년이 넘도록 다녔다. 이십 대 중반이 넘어가도록 제대로 된 직업이 없던 나는 돈벌이를 위한 학원강사 자리를 놓을 수가 없었다. 강사로 자리를 잡아가는데 정작 나는 구름을 잡느라 바빠서 강사 일에 마음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거 같았다. 드라마를 쓴다고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고 기사를 뒤적이고 책을 읽고 내 세포 하나하나 숨을 쉬는 거 같았다. 드라마 공모에 후드득 떨어져 교육원에 같이 다니던 동생의 소개로 아동용 교육 비디오를 쓰는 걸로 방송 작가를 시작했다. 돈은 언제 받을지 모르는데 일은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작가료를 못 받아 사장과 언성을 높이고 싸웠지만 폭삭 망해 사글셋방을 전전하는 그 사장과 또 손을 잡고 일했다.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프로덕션을 전전하며 일했고 늘어나는 일거리에 비해 내 통장 잔고는 텅텅 비었다. 밤샘을 밥먹듯이 하는 일상에 몸은 점점 지쳐갔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외삼촌이 말했다. 돈도 못 벌면서 바쁘기만 한 내 일이 말이다. 늘 받을 돈은 쌓여있는데 당장 쓸 돈이 없어 현금서비스를 받아야만 했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뛰어다니느라 바빠서 신도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려면 너무 힘이 들었다. 90년대 후반에는 서울과 신도시를 밤늦은 시간에 오가는 게 쉽지 않았다. 막차를 타거나 그 마저 놓치면 총알택시를 타야만 했다. 전철이나 버스의 막차 시간을 놓치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할 일이 많아 집에 못 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밤늦게 일이 끝나고 돌아가지 못할 때도 더러 있었다. 늦은 시간에 차가 끊길까 봐 조바심을 치며 돌아가도 좋은 소리는 못 듣기 일쑤였다. 엄마와 점점 말을 끊곤 했다. 그나마 네가 한 일 중에 제일 오래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돈은 안 벌어오니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부딪치기 싫어서 한 달이 넘도록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하필이면 좌석버스 안에서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다.

  독립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일과 결혼에서 아직 내 자리를 잡지 못한 나는 엄마와 씨름하기에 지쳐갔다. 내 삶의 푯대를 세우기에도 벅찬데 시시콜콜 참견과 비난을 하는 엄마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로부터 도망쳤다. 태백에 있는 예수원으로 갔다. 우연히 들었던 곳인데 예약도 없이 무작정 갔다. 다행히 받아줘서 며칠을 침묵 속에 지냈다. 머리를 비우고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돌아와 독립을 시켜달라고 했다. 하지만 벽은 단단했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냥 버텨야 할 뿐이다. 독립은 멀어졌고 탈출을 위해 결혼을 했다.

  아들은 자유로워 보인다. 그때 혼자 살았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이제야 진짜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오롯이 누리는데 아직 나는 독립이 낯설다.

작가의 이전글 정선생님을 추모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