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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나영 Aug 04. 2024

오죽

  강릉에 놀러 갈 때 한 번도 못 들어간 곳이 오죽헌이다. 까만색 대나무라는 말이 궁금했다. 텅 빈 베란다에 새로 키울 화초를 찾다가 오죽을 찾았다. 여러 개 사야 되는 거 아닌가? 달랑 한 개 사면 대나무가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대나무 숲의 사사사삭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은데 한 주만으로는 안 될 텐데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우선 먼저 한 주만이라도 키워보려고 주문을 했다.

   이사 오기 전에 이십 년이 넘게 살던 집을 정리하면서 살던 짐을 거의 다 버렸다. 묵혔던 살림이 어찌나 많은지 크지도 않은 집인데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애들 어려서 크리스마스에 썼던 플라스틱 나무며 꾸미기 위한 용품들까지 구석구석 참 야무지게 챙겨놓은 것을 다 꺼내 버렸다. 과거를 훌훌 털어버렸다. 인테리어 공사하는 동안 짐을 보관해야 돼서 화초를 맡겨야 했는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기로 했다. 애들 키우면서 정을 주고 키웠고 볼 만큼 충분히 봤다. 종아리만 한 율마는 굵직하게 자라 어른 키를 훌쩍 넘어 연둣빛 싱싱함을 자랑했다. 친하게 지내던 경비아저씨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율마 드려도 되냐고 여쭤봤다. 아저씨는 식물전문가셨다. 분갈이며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려주셨고 화분째 드리려고 했더니 전문가의 솜씨로 나무만 쏙 빼서 가져가셨다. 물만 많이 주면 되는 줄 아는 나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 율마와 유칼립투스도 아저씨 손에서 훨씬 사랑을 받을 거다. 이쁘다고 매년 샀던 수국은 당최 꽃을 본 적이 없다. 친한 후배 말마따나 수국은 사면 매년 깻잎만 보곤 했다. 가지를 쳐줘야 꽃이 난다고 해서 겨울에 싹둑싹둑 잘랐는데 한 여름이 넘어가도록 꽃이 필 줄 몰랐다. 수국도 떠나보냈다. 그 수국은 주인을 잘 만나서 분홍색으로 이쁘게 함박꽃을 피웠다. 한 철이 지나도록 꽃도 떨어지지 않아 보낸 보람이 있었다.

  이사를 와서 무엇을 키울까 고민을 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 유칼립투스도 종류대로 키워봤고 로즈메리, 남천, 파키라, 고무나무, 율마도 키웠으니 이제 뭘 키울까 고민하다 남천과 올리브나무 작은 것을 샀다. 올리브는 키우고 싶었는데 1미터 정도 되는 것은 가격이 꽤 나가서 늘 미뤄둔 것이다. 손 크기 정도의 화초 두 개를 화분에 옮겨 심으니 흐뭇했다. 무화과나무도 키워볼까 고민하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오죽에 마음을 뺏겼다. 오죽, 대나무를 심어야겠다. 주문을 넣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들한테 오죽 샀다고 자랑을 했다. 아들이 갑자기 대나무를 샀냐고 놀란다. 엄마 왜 죽순이 쉽게 보이지 않는 줄 알아? 대나무는 쑥쑥 자라서 죽순이 나고 며칠 안 돼 키가 훌쩍 커서 죽순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키가 큰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황당해했다. 아들과 함께 마트를 다녀오는데 전화가 왔다. 대나무 판매자는 본인이 뭘 잘못했는데 배송비만 보내달라고 했다. 요즘엔 들어도 제대로 기억도 못한다. 판매자에게 키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1미터 50이란다. 1미터에서 1미터 50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1미터만 딱 본 거다. 대나무는 기다란 박스에 배송됐다. 아들이 걱정한 대로 키가 크다. 화분에 옮겨 심으려고 흙을 사 왔다. 키가 좀 커서 잘라줘야 더 굵게 자랄 거 같아서 가위를 들고 잘라 보았다. 대나무가 왜 지조를 상징했는지 이제 알겠다. 톱이 필요했다.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 돼서 가위로 충분히 잘릴 줄 알았는데 대나무는 달랐다. 칼을 들고 삼십 분을 톱질해서 끊어냈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거 같다. 대나무 한 주면 쓸쓸하지 않을까 했는데 꽤 운치가 있다. 비스듬한 대나무 줄기와 뻗은 잎새가 볼수록 고상하고 우아하다. 아침이면 베란다에 은은한 향기가 가득하다. 대나무 잎사귀 끝이 까맣게 타들어가서 왜 그런지 알아보고 싶지만 귀찮다. 그냥 내 마음을 다 주고 돌본다. 새 잎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오죽에 물 주는 재미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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