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풍고는 주역의 18번째 괘이다. 그릇에 담긴 썩은 물에 구더기가 가득한 형상이란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이고 썩는 것은 부패한다. 벌레가 득시글거리고 썩은 게 없어져야 새로운 시작이다.
이십 대 내 삶은 풀리는 게 없었다. 도무지 앞도 안 보이고 미래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고 아버지가 무모하게 사업을 펼쳐서 빚쟁이가 들이닥쳤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는 새 여자 친구를 사귀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 버거웠다. 오늘은 어떤 힘을 내서 살아갈지 고민이었다. 사는 게 참 괴로웠다. 과외를 서너 개씩 하면서 돈을 벌었고 짬을 내서 공부를 하는 상황이었다. 졸업 후에도 진로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갈 실력도 안 됐지만 갈 마음도 딱히 없었다. 그때 답답한 내 삶을 알아보려고 사주공부를 했다. 사주며 손금 보기 등등 오만가지 미래를 알아보는 것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만난 책이 주역이었다.
주역을 읽으면서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64괘가 돌아가는 순리가 있었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답답한 생활에 나는 의욕도 없었고 풀이 많이 죽었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히려 중고등 시절에는 또렷하게 목표를 세우고 달렸었는데 갑자기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없어졌다. 주역의 괘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은 게 산풍고였다.
적당히가 참 어렵다. 좋은 일도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면 되는데 욕심을 부리기 쉽고 나쁜 일은 더더구나 적당하게 끝나지 않는다. 온 마음이 다 쓸려 나갈 정도로 괴롭고 힘들어야 끝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실직 생활을 오래 했던 아버지는 전기사업이라는 새로운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데 동네 사람 말만 믿고 시작했다. 아버지의 빚은 은행 대출에서 사채를 불렀고 집을 날렸다. 전세 보증금조차 제대로 없어서 월세집으로 바뀌었고 그 월세도 감당을 못 해서 반지하로 내려앉았다. 남자친구의 바람은 쉬지 않고 불었다. 마음을 기댈 곳이 없었던 나는 헛바람이 가득한 그 친구 바짓가랑이를 지질하게 붙들고 늘어졌다. 첫 번째 헤어짐이 대여섯 번쯤 이어질 때에야 나는 마음의 정리를 했다. 왜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나한테 너무 모질었던 이십 대였다. 내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었는데 훌훌 털어버리지 못해서 내 마음만 더 힘들게 만들었다.
실력도 없었고 해 놓은 게 없었다. 꾸준히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게 산풍고였다. 적절히, 적당히 나의 나쁜 운이 꺼져가길 바랐지만 새로운 시작은 구더기가 다 사라져야 시작될 모양이었다. 지쳐도 버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남의 자식의 엄마가 연초에 고소장을 날린 적이 있었다. 전처와 해결해야 할 일을 정리하지 못한 거다. 면접교섭권을 신청했지만 아이는 결코 자기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 몰라라 하는 남자와 씨름을 했다. 밤새 법원에 보낼 서류를 작성하면서 그 남자와 싸웠다. 결혼을 하고 삼 년이 넘도록 의붓자식의 엄마가 툭하면 등장하여 얼쩡거렸다. 나와 이혼한 남자는 전처와 자식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않았다. 자식을 만나고 싶다는 전처를 피하기만 하니 문제는 계속 일어났다. 전처와 내가 만나서 해결할 일이 아닌데 내가 세상을 우습게 보고 설쳤다. 아이가 아무리 자기 엄마를 만나기 싫다고 해도 법원은 친엄마라서 전처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아이가 법원에서 보낸 심리상담가를 만나서 친엄마를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 후에야 끝이 났다. 지난한 싸움은 설에 시작하여 추석이 지나도록 이어졌었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한 내란의 끝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산풍고를 떠올렸다. 그동안 국민을 위한 당론보다 저들 이익만을 앞세운 말도 안 되는 궤변만 늘어놓는 게 듣기 싫어서 정치 뉴스를 멀리했는데 썩은 물이 흘러넘친다. 구더기가 들끓는다. 부패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