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독감이 꽤 독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시름시름 아팠더랬다. 밤새 구토와 열에 시달렸다. 게으른 데다 병원 가기 싫어하는 나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서랍을 뒤져서 코로나로 고생했을 때 먹었던 약을 찾아 먹었다. 이불이 다 젖도록 땀을 흘리고 나서야 열이 가라앉았다. 며칠 열로 시달린 끝에는 기침이 시작됐었다. 코로나 때처럼 기분 나쁘게 목이 아팠었다. 내 감기는 아들에게 옮겨갔다. 아들 집에 잠시 들렀고 별 얘기도 안 했었는데 그 이튿날 아들은 전화로 엄마가 독감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도 그럴 거라고 했더니 아들은 엄청 아팠는지 병원에 다녀왔다고 갖은 짜증을 부렸다. 끙끙 앓는 아들이 안쓰러워 밤새 아들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이고 생강이랑 헛개나무를 밤새 달여 마실 물을 챙겼다. 아침 일찍부터 마트로 달려가서 저 좋아하는 고기 잔뜩 사서 갖다주고 욕만 먹고 돌아왔었다.
이모가 독감에 걸리셨다. 이번 독감 진짜 독하니까 조심하시라고 했더니 이모가 열 떨어지는 약을 한 통 샀다고 하셨다. 우리는 몇 천 원이면 병원에 약국까지 해결되는데 무슨 약을 한 병씩 사냐고 타박을 했더니 이모가 한국 가서 아프면 안 되니까 나도 먹고 너도 먹으라고 샀다고 하셨다.
독감이 폐렴이 됐다. 이모한테 연락이 안 됐다. 이상하다. 이렇게 하루종일 연락이 안 되는 이모가 아닌데 정말 이상했다. 한 이틀이 지난 뒤에야 이모가 응급차를 불러서 병원으로 가신 것을 알게 됐다. 어지러워. 계속 어지럽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폐렴인데 왜 어지러운지 이상했다. 폐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모는 중환자실에 계속 계셨고 캘리포니아에 사는 큰 딸이 시카고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씩씩한 이모는 기운이 없으셨다. 장민호 공연이 일주일도 안 남은 상태에서 이모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금요일에 입원하여 주말을 보내고 이모는 의사에게 수요일에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처음에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했었는데 주말을 지나면서 안 된다고 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 심장 수술을 하신단다. 폐렴은 심장수술로 심각해졌다. 다행히 수술을 안 하시고 약물치료로 경과를 지켜보는 걸로 진행이 됐다.
이모가 장민호 공연에 대한 기대로 몇 달을 흥분상태로 지내셨다. 그 기대가 연기가 됐다. 부산공연을 용인공연으로 바꾸고자 했지만 결국 79세의 나이는 쉽지 않았다. 3월 22일에 하는 용인공연만이라도 보고 싶어 하셨지만 기력이 당해내지 못했다. 딸들이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고 했다고 이모는 당신의 남은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누리고 싶어 하셨다. 그동안 이모는 너무도 건강했었다. 한 번도 이렇게 크게 아파본 적이 없던 이모였다. 나처럼 병원 가기 싫어하시는 이모가 고혈압이 좀 괜찮아지셨다고 약을 안 드셨었다. 고혈압이 문제였다고 했다. 이모한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모의 실망은 병 앞에 힘이 빠졌다. 건강이 하고 싶은 것보다 힘이 셌다.
이모는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기력이 없으셨다. 어지럽다고 하셔도 곧 한국에 갈 기대에 부풀어 힘이 넘치셨었는데 목소리에 힘이 빠지셨다. 부산 공연에서 못 만난 민트팬들이 보내주는 선물은 이모의 지인을 통해 부쳐드리기로 했다. 민트팬들과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며 하루하루 행복한 꿈을 꾸셨었는데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공연으로 미뤄졌다. 이모의 티켓은 상하이에서 오는 다른 민트팬에게 팔렸다. 이모의 부산행 기차표도 취소를 했다. 이모는 취소하는 것을 걱정하셨다. 이모에게 보낼 달팽이 크림을 잔뜩 샀다. 이모는 병원에서도 달팽이크림 가격이 오를까 봐 걱정하셨다.
이모는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건강하셨는지를 말씀하셨다. 나는 비행기만 타면 몸이 아픈 사람이라 심장인데 꼭 비행기를 타셔야겠냐고 극구 말렸었다. 이모는 비행기만 타면 잠도 잘 자고 잘 먹는다고 전혀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하셨다. 내가 해외여행을 싫어하게 된 것도 비행기만 타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파서였다. 평생 골골한 내 체력을 갖고 비행을 몇 시간씩 하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여행하고 와서도 며칠을 앓아야 했다.
이모가 정말 다행이라고 하셨다. 쓰러질 찰나에 응급차를 부른 것도 다행이고 심장이 문제지만 수술까지 안 한 것도 정말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하셨다. 이모는 장민호를 만나는 기대를 못 내려놓으셨었다. 심장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그 미련을 내려놓으셨다. 장민호의 민트팬 얘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이모는 목소리에 흥이 올랐다.
병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를 온전히 주장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감에 넘쳐 뭐든 다 할 듯이 날뛰다가도 병에 걸리면 나를 꼭 돌아보게 만든다. 고3 시절 나는 허리디스크가 도져 누워 지냈다. 너무 허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공부도 꿈도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사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내 뼈는 부실해서 치아도 내 열정을 이겨내지 못했다. 힘이 들면 여지없이 잇몸에 피고름주머니가 주렁주렁 생기곤 했다. 이젠 내 몸을 살살 달래가면서 사는 요령이 생겼다. 약발로 사는 내 인생은 건강과는 거리가 멀다. 살을 뺀다고 좀 안 먹거나 무얼 좀 열심히 하면 여지없이 아팠으니까. 그리고 건강해지면 감사함이 저절로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