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온기
이영애를 떠오르게 했던
지연이 어머니가 암판정을 받으셨다
당시
일 때문에 입원 중이신 병원 근처를
여러 차례 지나가곤 했다
'여유가 생기면 찾아뵈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병원이었다
궁색한 핑계를 대본다면
지연이가 말을 자세히 하는 편이 아니어서
어머니의 병세를 잘 몰랐다
요새
'의료기술이 워낙 많이 발전했으니,
암까지 정복했을지도 몰라'
혹시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셨다'는 연락이 올 수도 있고...
아마도
때가 되면 낫는 감기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해맑은 착각이었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이 없었으니
그것의
경중을 몰랐던 건 당연한 것이었을까
나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달 전 즘
지연이 전화가 울렸다
"암이 전이가 됐다고 해서... 엄마가 좀 안 좋아지셨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지연이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조만간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긴다'라는 소식과
어머니가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했다
대학 다닐 때 단 한 번 뵈었고
그것마저 남의 집에서 잘 신고 있는,
'지압신발이 아프다'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나를...
"그래? 지연아, 그럼 이번 주에 병원에 가도 돼?"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물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어머니께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게 느껴졌다
그 시간에 나를 기억하신다 는 것이 감동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그 이면에 있는 슬픔까지 느껴야 했다
건강이 악화되시니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얼마 뒤
직계가족만 들어갈 수 있다는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기셨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지연아! 내가 너 인척 네 옷을 입고 가면 안 돼?
내가 너랑 친한 친구 맞지?!
그러면 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왜 어머니를 만날 수 없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삼단논법을 펼치며 생떼를 부렸다
옆에서 말이 안 되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께서 크게 웃으셨다
부고문자를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지연이는 웃고 있었다
대학에서 처음 만나던 날도
신비한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도
무슨 때도 아닌데 선물을 내밀 면서도
그렇게 웃고 있었다
이번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웃음이었지만
나를 보며 의연하게 웃어준 덕분에
옆에 머무르는 동안 미안한 마음이 덜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
지연이 전화가 울려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어 지연아, 잘 있었지?"
"응 마음아, 혹시 집 주소 좀 알려줄 수 있어?"
갑자기
우리 집 주소를 알려달라는 지연이에게
"왜? 이번에는 어떤 걸 보려고 하는데?
네가 안 쓰는 거 보내면 받을 거고,
새로운 것을 사서 보내면 반송할 거야"
'힘들 것 같은 친구를 위로'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몸에 익은 옷 같은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께서 나와 관련된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 지연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것 같아,
마음이 다녀가거든, 명절 때 과일 선물 꼭 보내줘"
지연이는
"어머니 말씀대로 정말 너를 만나게 됐네.
아마 앞을 내다보셨나 봐..."라고 했다
며칠 동안
안에서 뜨끈한 것이 울컥 올라왔다
일을 하다가
밥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누군가에게 눈물을 보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눈물을 감추려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결혼을 안 한 지연이를 부탁해라고 하신 걸까?
정이 많은 나에게 마음아 고마워 말씀하시려던 걸까?
커다랗고 과즙이 가득한 배를 잘라서
석둑석둑 썰ㅡ었다
유기농이라 그런지 참으로 달았다
그런데
전에 먹었던 것인지
처음 먹는 맛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쌉싸름한데, 아프고, 아린데 행복한
그것이 내 안에서 유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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