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일들에 이름을 붙여주면, 비로소 나의 계절이 시작된다.
나는 요즘 매일 아침, 집으로 출근을 합니다.
'가정주부'라는 이름의 직업을 가진 마흔여섯의 여자. 남들은 쉽게 말하곤 하죠. 매일 똑같은 일 아니냐고, 티도 안 나는 일 아니냐고. 하지만 누구도 잘했다 말해주지 않는 이 고요한 노동 속에서 나는 나만의 성취를 길어 올리기로 했습니다.
의미 없이 투명하게 흘러갈 뻔한 하루에 색깔을 입히고 생기를 불어넣는 일. 햇살이 맑은 날엔 창을 넓게 열어 집안 깊숙이 볕을 모시고, 구름 낀 날엔 서늘한 공기에 마음의 긴장을 살짝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요즘 나의 '루틴'입니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매일을 단단한 '나'로 살게 해주는 유일한 구명보트 같은 것 말이죠.
오전 7시,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하며 하루를 깨웁니다. 당근과 사과, 올리브 오일을 믹서에 갈아 남편과 나누어 마시는 주스 한 잔. 그것은 우리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건너가길 바라는 작은 의식입니다. 가족들이 각자의 일터와 학교로 떠난 오전 8시 20분. 비로소 나의 진짜 업무가 시작됩니다.
세탁기를 돌리고 아파트 헬스장으로 향합니다. 한 시간 남짓, 기구 사이를 오가며 거친 숨을 내뱉고 근력을 키웁니다. 온몸에 땀이 맺히고 혈액이 힘차게 도는 그 생동감이 좋습니다. 돌아와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밀고, 창을 열어 환기를 한 뒤 땀에 젖은 몸을 씻어낼 때의 개운함. 그 정적 속에서 잠시 호흡을 고르는 시간은 세상 무엇보다 달콤합니다.
간단한 식사 후에는 오롯이 '나'를 위한 업무를 봅니다. 책을 읽고, 사이버대 강의를 듣고, 블로그에 글을 쓰며 작은 수익을 만드는 일. 이것은 주부라는 역할 이전에 존재했던 '나'의 조각들을 맞추는 과정입니다.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 곳곳을 누비는 걸음은 운동이자 생활이 되고, 하교한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며 나누는 이야기는 하루의 가장 따뜻한 매듭이 됩니다.
한 달에 한 번, 남편이 건네는 생활비는 내가 한 달 동안 성실히 수행한 노동에 대한 '월급'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보상이 마음의 보람으로 치환되는 순간, 나의 직업 정신은 다시금 고개를 듭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수많은 역할의 옷을 갈아입으며 살다 보면, 가끔은 그 옷에 몸이 끼어 숨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조금만 서툴러도 '직무유기'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려 합니다. 불안이 엄습할 땐 자연으로 눈을 돌립니다. 흐르는 구름, 비 오는 소리, 푸른 나무의 냄새. 그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며 감정을 강물처럼 흘려보냅니다.
어쩌면 매일이 똑같은 도돌이표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무던한 일상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달려갑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요즘, 비로소 잊고 지냈던 나의 진짜 이름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나'로서 바로 서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비로소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