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10월의 첫사랑, 풋사과 같던 그 시절에게

찬란했던 어느 10월, 나의 첫사랑에게 안녕을 고한다

by 지인

어느 10월의 첫사랑, 풋사과 같던 그 시절에게



​내 나이 열아홉, '응급구조과'라는 생소한 이름표를 달고 대학이라는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부진 각오로 시작한 대학 생활은 활기찼다. 이론과 실습은 흥미로웠고, 축제와 MT로 이어지는 나날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여름방학 내내 빵집에서 꽈배기를 튀기고 샌드위치를 만들며 부지런히 보낸 뒤 마주한 2학기의 어느 늦여름이었다.


​복학한 선배들의 이야기로 강의실이 들썩이던 날, "박찬호 닮은 선배가 있다"는 소문에 내심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 순간 내 눈이 그로 꽉 찼다. 심장은 요동치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강의 내용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다가갈까, 기다릴까. 마음속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름이 뭐야?"
먼저 말을 건넨 건 선배였다.
"지인이요."
"이름 특이하네. 자주 보자."
​그 짧은 인사가 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선배의 동기를 붙잡고 '구원 요청'을 한 끝에 마련된 술자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친구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주자 나는 용기를 냈다.
"선배, 나 선배 많이 좋아해요."
"알아."
"알면서 모른 척한 거예요?"
"ㅎㅎ 재밌잖아. 서로 편하게 지내자. 난 그게 좋은데."
​차인 걸까, 아니면 여지를 둔 걸까. 우리는 밤새 통화를 하고 도심 공원으로 소풍을 가며 묘한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말고사를 앞두고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 선배에게 사귀는 사람이 생겼단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끌어모아 10장의 편지를 썼다. 내 진심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종강 술자리에서 나는 주정을 부리며 울었다. 그리고 취해있는 그를 찾아가 따져 물었다. 선배는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따뜻했지만 아픈 품이었다. 그 이상의 관계를 욕심내는 내가 바보 같아 서글펐다.


​졸업 후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밤샘 근무를 하는 내게 팩스 주문을 부탁하며 연락해 오던 선배. 대전에 내려와 가끔 밥을 사주던 선배. 하지만 애인과 싸울 때면 내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상담하던 그는, 끝내 내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지인아, 넌 그냥 좋은 후배야."
​마지막 고백에 돌아온 대답은 명확했다. 나는 그에게 여자로 보이지 않는, 그저 편한 후배일 뿐이었다.


3년 뒤, 친구의 결혼식 날 선배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올렸다. 세월이 흘러도 가끔 전화해 안부를 묻는 그는 여전히 나의 대학 시절을 꽉 채웠던 그리운 이름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설레고 시리다. 풋사과처럼 아쉽게 끝나버린 짝사랑이었지만, 나는 내 감정에 누구보다 충실했다. 용기 있게 고백했던 그 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내 가슴속에 살아있다.


찬란했던 어느 10월,

나의 첫사랑에게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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