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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빠졌다.

소설 감성 #006.

 오늘 그와 헤어졌다. 아니, 헤어짐을 당했다. 


 울렁거리는 숙취에 저항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으레 그랬듯 더듬더듬 스마트폰을 잡았다. 가장 먼저 보인 문자 내용은 생소했다.



...

「우리 이만 헤어지자. 미안하다.」

 충격적인 그 문구는 숙취를 단번에 날렸다. 멀쩡해진, 허나 멀쩡하지 않은 정신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겨우 닿은 통화에서 그녀가 그에게 들은 말은 문자와 같은 내용이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남자는 이미 남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였던'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멍-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단어였다. 

 '왜?'

 그 한 단어가 수억개가 되어 머리를, 귀를 울렸다.

 그와 그녀는 어제 만났었다. 주말이었고 보통의 데이트 날이었다. 직장을 다니는 둘은 주말에만 볼 수 있었고 간만에 만난 둘은 여타의 연인보다 조금 더 애틋하고 끈적했다. 눈이 내려 미끄러워진 길을 걷기 무섭다며 그에게 팔짱을 낀 그녀는 남자의 오리털파카가 차갑다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까지 갔다.

 예매한 영화가 상영하기까지 시간이 남았었다. 둘은 언제나 그러했듯 오락실에 가서 대전 격투 게임을 하였다. 그가 제일 잘하는 캐릭터는 따로 있었으나, 그녀와 할 때는 그녀와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캐릭터를 골랐다. 그녀는 그게 좋았다. 소소한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카라멜팝콘과 나쵸와 콜라가 나오는 세트 메뉴를 들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손을 꽈악 잡고 감상을 하였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는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깍지를 낀채 보조를 맞추던 그녀는 나무에 걸려있는 눈을 그에게 던졌다. 가볍게 웃으며 그 역시 반격했다. 그들의 장난은 조금 지친다 싶을 때 끝났다. 그는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뭘 먹을지 고민하던 둘은 공원 인근의 시설 좋은 돈까스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녀가 수저를 챙기는 동안 그는 휴지 두 장을 꺼내 서로의 앞에 놓았다. 그 위에 그녀가 수저를 놓았다.
 그가 물을 뜨러 움직인 동안 그녀는 단무지를 본인의 앞으로, 김치를 그의 앞으로 놓았다.
 그가 돈까스를 시키자, 그녀는 리조또를 시켰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자신의 음식을 양단해 상대의 접시에 가져다 주었다.
 남자가 계산을 하는 동안 여자는 근처에 있는 커피집을 찾았고, 미리 가서 본인이 마실 바닐라라떼 휘핑 빼고 초코시럽 많이와 그가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적게를 시켰다. 계산을 끝낸 그가 테이블로 다가올 즈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브이를 그리며 씨익 웃었다.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일주일간의 이야기를 한 둘은 장소를 옮겨 한 잔 했다. 
 기분이 좋았던 그녀는 그런 기분일 때 항상 그랬듯이 주량보다 조금 더 많이 마셨고, 그는 가볍게 맥주를 한 잔했다. 휘청휘청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고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뜬 아침, 그녀는 그와 헤어짐을 당했다. 
 조금도 달라진게 없는 일상의 데이트를 한 번 더 했을 뿐인데 이별을 통보받았다.
 정말 언제나와 같았다. 다른게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휘청 일어났다. 통장이 발에 걸렸다. 다가오는 그의 생일 선물을 위해 저녁을 생략해가며 모아가던 돈이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다시 멍해진 그녀는 불현듯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자신의 약지를 쳐다보았다. 
커플링이 헐거워 마디 안에서 덜렁이고 있었다.

 '...손가락 살이 빠졌네...'

  겨우 찾은 이별의 징조였다. 고작 그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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