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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딴 짓을 한다.

[나는 작가다 공모전_나의 시작과 도전기]

© rhondak, 출처 Unsplash



그래. 요즘은 만화 안 그리지?


지도 교수님은 나를 볼 때마다 이 질문을 하셨다. 대학교 4년 내내. 아니, 대학원 2년 추가.

그럴 때마다 난 ‘계속 그릴 건데요?’ 라는 말을 삼키고 멋쩍게 웃었다. 

내 전공은 심리학이다. 만화는 전공에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딴 짓이었다. 그 일에 매주 20시간 이상을 쏟는 학생이 나였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쓸모없는 짓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 EBS에서 방학생활을 방영했었다. 난 매일 1학년부터 6학년 방학생활까지 전부 봤다. 물론 숙제 때문에 보기 시작했지만 나중엔 그냥 봤다. 딱히 목적이랄 건 없었다. 재밌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저런 것도 배우는구나! 하며 신기했다. 엄마도 형도 “왜 그걸 다 보고 있어?” 라며 핀잔을 줬지만 그래도 꾸준히 봤다.


난 말이 느린 편이었다. 

생각하는 건 많은데 말이 느리다보니 다른 사람 입장에선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웠나보다. 난 어느덧 말이 느린 아이가 아니라 말을 잘 못 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자연스레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나의 상상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한 번 그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그렸다. 쉬는 시간만 되면 만화 스토리를 구상했다. 내 상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남들에게 공유하는 게 좋았다. 


만화를 그리다보니 같은 상황에서도 캐릭터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각자의 선택을 했다. 작가가 아니라 캐릭터가 상황을 만들었다. 그게 재밌었다. 가상의 캐릭터도 이러는데 실제 사람들은 어떨까? 더 신기하겠지? 그래서 사람을 배울 수 있는 학과가 무엇인지 찾아봤다. 심리학과. 제일 재밌어보였다. 

고2, 진로상담을 하는 담임 선생님께 심리학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허구한 날 만화만 그리던 애가 엉뚱한 학과를 말하니 선생님도 놀랐다. 이제 정신 차렸냐며 칭찬 받았다. 속내는 모르셨겠지.


전공을 심리학으로 고른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정말 재밌었다. 하루하루 즐겁게 수업을 듣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만화 스토리를 구상했다. 본격적인 연재물을 만들었고, 자체적으로 매주 월요일 업로드 원칙을 정해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수익? 당연히 없었다.

창작 하는 사람들과 친해지며 내 상상을 구현할 수 있는 툴이 만화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스토리 위주의 게임도 만들었다.

상담 중에 사이코드라마라는 기법이 있다. 즉석에서 장면과 상황을 만들어 심리치료를 하는 고급 상담 기술인데 워낙 어렵고 복잡해서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비주류 상담기법이다. 상관없었다. 제일 재밌어보였기에 이것을 주요 전공으로 삼았다.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 건 왜 하는 거야? 그거 하면 뭐 줘?”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건데?”


사람들이 말했다. 이젠 정말 쓸모없는 거 그만하고 현실을 봐야하지 않겠냐고. 

난 알겠다고 했다. 영혼 없이. 그리고 다시 쓸모없는 것들을 했다. 



나는 믿었다. 이 재밌는 것들이 쓸모없는 게 아님을. 만화를 그릴 수 있는 내 창의력을. 한 번 시작하면 누가 뭐라고 하든 꾸준히 하는 성실함을. 

내겐 어느덧 2,000페이지가 넘는 만화 원고공모전 3위를 수상한 게임이 있었다.


졸업을 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동기들은 취업도 살 길도 비전도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지금껏 해온 것들이 나만의 길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심리 상담을 거부하는 청소년이 있으면 함께 만화를 그리면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며칠 만에 난 아이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은 상담 선생님이 되었다. 

심리 상담을 받는 내담자를 이해하려면 상식과 경험이 많아야 유리했다. 이 때 초등학교부터 봤던 잡다한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난 잡학다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이코드라마에서 즉각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심리치료를 하는 데에 만화를 구상하며 쌓아온 상상력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남들은 몇 년 만에 따는 자격증을 난 1년 만에 땄다.


사람들은 내게 쓸모없이 딴 짓만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 

다양한 경험을 했기에 남들이 쉽사리 하지 못 하는 것도 해냈다. 난 독특하고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자체가 매력적인 브랜드였다.


나의 시작은 현재진행형이다. 예전부터 쌓아놨던 쓸모없는 것들이 묘한 접점을 이루어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앞으로 매년 내 이름을 걸고 책이 나올 것이다. 꾸준히 써나갔던 글을 보고 한 출판사가 연락을 해왔다. 현재 계약 완료 상태이다.

라디오 방송에서 매주 생활 심리학 코너를 맡았다. 재밌을 것 같아 시작한 해외 심리 저널 번역을 보고 방송국 PD님에게 연락이 온 덕이다.


내겐 거창한 목표가 없다. 단지 지금 재밌는 걸 한다

대신 잊지 않는다. 내가 뭘 했는지, 이게 어떤 재미가 있는지, 이걸 어떻게 내 삶과 연결할 수 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넓어지면 자연스레 깊어진다고. 그게 재밌는 동시에 멋진 삶을 만든다고.


오늘도 난 쓸모 있는 딴 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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