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좌절을 경험치로 만드는 무기 : 회복 탄력성

01. 회복탄력성을 무기로 쓰는 방법

“올해도 무탈하시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과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돈 많이 벌어라.’, ‘건강해라.’, ‘하던 일 잘 되어라.’ 등. 한 해의 안녕을 담고 있어요. 그 중 ‘올해도 무난히 지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인사도 있죠.

이거 이상하지 않나요? 덕담인데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니.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짤막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Q) 평생의 일주일을 선택할 수 있다면?

A)
고만고만 무난 확정의 일주일 – 23%
커다란 하루의 기쁨 확정. (다른 날은 랜덤) - 40%
6일의 큰 기쁨 대신 하루의 큰 슬픔 확정 – 8%
그냥 지금처럼 살란다. - 29%
(총 참여 인원 339명)


매일 행복하게 사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대부분 그 쪽을 택했을 거에요. 허나 ‘행복이 많되 불행한 날이 있는 것’, ‘행복할 일 없는데 아무 일 없이 무난한 것’ 중 선택하라고 하자 압도적으로 후자가 많았습니다.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행이 있는 행복’보다 ‘불행 없는 무난함’을 골랐습니다. 이는 좌절, 절망, 불행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대변합니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의 바람은 ‘나는 불행하고 싶지 않다.’ 에 더 가깝습니다. 우린 불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통과 슬픔에 취약합니다. 최대한 피하려 하죠.

하지만 그럴 수 있나요? 절망하지 않을 수 있나요? 인생을 오로지 성공과 기쁨만으로 도배할 수 있나요?


불교 4법인 중 ‘일체개고(一切皆苦)’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며 삶 전체가 짊어지고 가는 것’ 라는 뜻이에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출가를 한 이유도 ‘왜 우리에게 삶은 고통일까?’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들 삶에 고통(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지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봐야 합니다.

원치 않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노력이 배신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크고 작은 일이 생깁니다. 잔인하게도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자기 삶이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심지어 누가 봐도 고통스러운, 불행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꾸며진 웃음이 아니라 진심 어린 밝음을 유지하면서.

반면 모두의 선망을 받는, 누가 보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인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삶이 불행하다 여기며 우울해합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아마 이 무기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 일 것입니다. 바로 ‘회복탄력성’이라는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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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있더라도 회복탄력성이 있으면 불행하지 않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요소는 무엇일까요? 흔히 행복하기 위해선 고통스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만 보고, 듣고, 행여 위험하거나 나빠질 일은 미연에 방지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죠.


앞서 전 의도적으로 불행과 고통을 동일한 개념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아마 여러분은 고통이 곧 불행한 삶이라 여기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프랑스의 고전작가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는 “가장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스스로 큰 고민 속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불행은 피할 수 있어요. 내가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죠.


행복하려면 '행복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도 잘 견디고 극복해내는 긍정적인 대처',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느끼는 만족과 감사' 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살다가 만나는 시련, 아픔, 절망 따위에서 벗어나 마음을 탄력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나타내는 개념이 바로 회복탄력성입니다.


독일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사람은 불행에 빠져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고 얘기했고,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풀러(Thomas Fuller)는 “불행은 대개 고민이나 번뇌를 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때문에 생겨난다. 불행을 통해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회복탄력성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절망과 회피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면? 흔히 이걸 '멘탈이 강하다'고 표현하지만 멘탈이 무너져도 상관없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주저앉아 있다가 언제든지 '다시금 일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회복해서 탄력있게!


‘그럼 어떻게 해야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는데?’

‘내 회복탄력성은 높은 편이야? 낮은 편이야?’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겠네요. 그러나 이에 앞서 다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우린 어쩌다가 ‘고통’이 곧 ‘불행’이라고 여기게 되었을까요? 나도 모르게 쓰고 있는 마음의 습관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제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간편하고 명료한 단순 심리학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내 마음 속 회복탄력성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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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자존감이라는 허상


미리 말해둘게요. 전 이 책에서 여러 번 ‘자존감 개념’을 비판할 거에요.

자존감은 ‘자기존중감 – 자기자신을 존중하는 마음’ 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해’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자존감이 항상 좋기만 할까요?


이솝우화 벌거벗은 임금님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우스꽝스럽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님이 겨우 사기꾼 재단사에게 속아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옷’을 입고 거리를 행차해요. 그 결과 백성들의 비웃음을 사고 임금님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궁궐로 도망치죠.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셋을 추려봅시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알려준 아이, 재단사, 임금님.

이 중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 명 모두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볼까요?

왕이 행차를 하고 있는 엄숙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임금을 보며 웃었습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용기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죠.

이 경우 아이의 자존감 원천은 ‘세상 풍파를 모르는 순진무구’입니다.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게 없었기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두세살만 되어도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부모 입장에선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지만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리고 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용감하고 솔직할 수 있습니다. 임금을 보고 웃었던 아이처럼.


사기꾼 재단사를 보죠.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사기 행각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해냈잖아요. 웬만한 대담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경우 재단사의 자존감 원천은 ‘권력에 대한 무시 그리고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 돈은커녕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단사는 임금님과 신하들의 허영심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사기를 이어갔습니다. 대단한 자기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는 “공격적인 반응은 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일으키며, 높은 자존감이 공격성의 중요한 원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재단사는 분명 가해자입니다. 허나 사기를 칠 수 있었던 핵심 원천은 높은 자존감이죠.

자존감 판타지를 신봉하는 이에게 이 대목은 충격적일 수 있겠네요.

“그가 정말 자존감이 높았다면 사기 행각을 통해 돈을 벌지 않았을 거에요.”

“실제로는 자존감이 낮았기 때문에 그는 옳지 않은 행동으로 이득을 취했어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보세요. 재단사는 엄연히 자기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을 뿐입니다.


제가 볼 때 가장 올바른 자존감을 형성하고 있는 건 바로 임금님입니다.

물론 허영심이 있고, 타인 평가에 민감하기에 벌거벗고 행차하는 우(愚)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비웃음을 듣고 보인 행동은 그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임을 알게 해줍니다. 수치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말을 받아들였잖아요.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행차를 중단했다고요.

만약 임금님이 자존감이 낮았다면 비웃는 아이를 색출하여 벌을 내렸을 겁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데도 한 명의 백성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건, 임금님이 어리석을 뿐 성군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증명합니다.

이 경우 임금님의 자존감 원천은 ‘나를 위협하는 말도 귀담아듣고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입니다. 아마 여기에서 임금님이 아이에게 형벌을 내렸다면, 아이는 평생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표현하지 못 하고 눈치 봤을지 몰라요. 임금님은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었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자존감이 탄탄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가요? ‘아, 자존감이란 어떤 거구나!’라고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나요?

오히려 헷갈리지 않나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자존감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에게 붙이는 모호한 훈장’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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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사랑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말 80-90년대만 해도 생소했어요. 나는 가족의 일원이고, 사회의 일꾼이었습니다. 사랑은 일하고 돈 버는 걸로 증명해야죠. 그래서 가족들 잘살게 해줘야죠. 나에게 셀프로 준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일입니다.

이런 흐름을 바꾼 게 ‘나는 나를 사랑해’로 대변되는 자존감 열풍이에요.

높은 자존감. 좋아요. 타인의 비판에, 마음처럼 안 풀리는 환경에, 뜻대로 도와주지 않는 삶에 꺾이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허나 회복탄력성이 없는 자존감은 묘한 변종을 만듭니다.

소위 ‘좋은 거’만 받아들이고 ‘나쁜 거’는 쳐내며 힐링을 편식하거든요.

“너는 예뻐.”, “너는 최고야.”, “네가 무엇을 하더라도 나는 너를 응원해.” 이런 힐링 위로는 듣지만, “이건 예쁘지 않아.”, “이건 조심해줘.”, “네가 이것을 한다면 나는 너를 응원할 수 없어.” 라는 말은 듣지 않습니다.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이 쯤 되면 상대방이 위하는 마음에서 한 충고마저 나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회복탄력성이 없으면 주저앉았을 때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아!’라고 생각해요. 힘들고 우울할 때도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 않아!’, 화나고 슬플 때도 ‘나는 슬프지 않아. 그저 나를 이렇게 만든 저 사람에게 화가 날 뿐이야!’라고 여깁니다. 그래야 살 수 있거든요. 무너지면 그 순간 끝이니까.

그렇기에 편식합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취급합니다. 나의 멋지고 괜찮은 모습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만 부각시키며 생각합니다. ‘그래.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자존감을 지켜야 해!’

이는 긍정적인 모습만 과장하여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와 같습니다. 허황되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죠.


회복탄력성을 갖춘 자존감은 편식하지 않습니다. 나 자체를 존중하며, 나와 연결된 타인 역시 존중할 줄 압니다. 넘어지더라도 일어날 수 있기에 양보할 때도, 타협할 때도 있습니다. 내게 좌절을 통해 깨달음을 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행복한 모습만 받아들이는 ‘반쪽짜리 자존감’은 ‘불행한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어려움에도 금세 무너지고 맙니다. 자존감은 ‘나는 나를 사랑해’이지만, 여기서 ‘나’란 ‘행복한 나’ 뿐만 아니라 ‘불행한 나’까지 포함한 개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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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방해가 되는 자존감에는 무엇이 있을까?


회복탄력성이라는 무기를 갖추고 있어야 건강한 자존감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회복탄력성을 기르지 않은 자존감은 삶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첫째, 실패 자체를 경험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실패는 아픕니다. 좌절은 힘듭니다. 피할 수 있다면 가급적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는 말이 오히려 상대를 나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상담을 받으며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내담자가 있었습니다. 고집불통인 남편이 너무 정떨어진다면서요. 그런데 불만과 달리 말 중간중간에 남편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녹아 있었습니다.


“저는 애 아빠보다 제가 먼저 죽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어떤 걱정인가요?

“애 아빠 혼자 밥 차려본 적도 없고, 은행 업무도 못 보고, 세금 하나도 제대로 못 내는데 제가 죽어봐요. 살겠어요? 며칠 안에 송장 치를걸요?”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부모님이 늦둥이를 낳아 6살 된 동생이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제게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내 동생이 올해 여섯 살이거든. 근데 얘가 이제 나이 먹었다고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한다? 그러다가 다치고 또 울고.”

“그 나이대 애가 다 그렇잖아. 다치면서 크는 거지.”

“야! 네가 애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애 있으면 그렇게 말 못 할걸?”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동생이 아니라 거의 자식 같았습니다. 저도 퉁명스럽게 되받아쳤습니다.


“그러는 너는 애 있어? 걔 네 동생이야. 아들 아니라고!”

“윽! 그건 그렇지만,”

“나는 이해가 안 돼. 애들이 좀 다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커야지. 너처럼 감싸고 도는 거 오히려 걔한테 안 좋다니까? 내가 어떤 책에서 봤는데 어릴 때 좋은 거, 깨끗한 거, 건강한 거만 먹고 살면 나중에 면역이 떨어져서 더 아프다더라.”

“그렇지만...”

“사실 너도 뭐 하다가 잘못되면 멘붕 걸려서 몇날며칠을 그 생각만 하잖아. 그러니 동생한테도 더 그러지. 애한테 실패도 가르쳐. 여섯 살이면 충분히 배울만한 나이야.”


그러자 친구가 머뭇머뭇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랬다가 자존감 떨어지면 어떡해?’



실패하면 상처 받아서 자존감이 떨어질테니 실패하지 않도록 경험 자체를 막는다. 이게 옳은 방법일까요? 평생 동생 곁에서 붙어 동생 뒤치다꺼리를 해줄 수 있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다 처리해줄게! 넌 가만히 있어!’

이러면 되니까요. 그러나 동생도 언젠가 자라서 독립할 때가 옵니다. 자신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런 걸 흔히 ‘어른’이 되어 간다고 하죠. 단 한 번도 경험을 하지 않은 아이가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어른이 될 리 만무합니다.


힘들고 아프다는 이유로 군인에게 아무런 훈련도 시키지 않는다면? 그런데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 군인이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심하게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실전에서의 부상은 훈련할 때의 부상과 차원이 다릅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커다랄 확률이 높습니다.

어찌 보면 유년기의 ‘실패’는 부모라는 안전한 둥지 안에서 사회를 예행 연습할 수 있는 훈련 기간입니다.

잊지 맙시다. 실패 경험을 앗아가는 건 그 아이가 어른이 될 기회를 빼앗는 이기적인 생각임을.


“너의 나중은 잘 모르겠고, 내 옆에 있을 때 괴로워하면 내가 보기 힘들어. 내가 수습하기도 곤란해. 그러니까 그냥 안전하게 얌전히 있어” 이런 말입니다.


둘째, 오냐오냐만 받으며 살아온 경우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는 “사람을 바름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칭찬을 듣기 좋아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고 했습니다. 칭찬이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멀쩡한 고래가 갑자기 춤을 출까요?

그렇기에 칭찬은 매우 신중하고 일관성 있게 해야 합니다. 실패를 알려주기 두려워서 바른 일, 그른 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오냐오냐’만 한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되겠어요?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병적 자기애’만 가득한 상태가 됩니다.

아이의 달리기 속도가 빠르다면 박수치며 칭찬해줄 수 있습니다. 허나 그 아이가 창밖에 걸터앉아 “나 엄청 빠르니까 날 수 있어!”라고 한다면? 그땐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나는 건 불가능해”라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 아이의 자기애를 ‘좌절’시켜야 해요.

소화할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그래!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오냐오냐”라고 칭찬하는 사람은 정말 책임감 없는 사람입니다. 상상을 응원하되 현실에 발을 붙인 채로 살 수 있도록 해야죠!


미숙하고 잘하지 못하니까 혹은 제대로 알지 못 하기 때문에 당연히 넘어집니다. 실패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중요한 건 ‘실패 이후에 어떤 경험을 했는가?’입니다.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중하구나. 내가 실패해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다음부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쓰러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열쇠, 회복탄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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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탄력성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다?


회복탄력성이라는 삶의 무기를 어떻게 하면 갖출 수 있을까요? 회복탄력성을 늘리는 방법이 있을까요?


토마스 보인스 교수는 같은 스트레스 상황이라도 민감도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는 민감하기 때문에 높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다른 누군가는 둔감해서 스트레스를 적게 받습니다. 스트레스에 둔감한 사람은 상황에 대한 높은 적응력을 보이며 회복탄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했습니다. APGAR 점수가 아이의 스트레스 적응력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약 34,000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APGAR 점수와 5살 때 발달상의 취약점이 높은 연관성을 보였습니다. 즉, 회복탄력성은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실험 결과를 보며 이런 의문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그럼 내 APGAR 점수가 몇 점이었는지 알아봐야 하나?’

‘그럼 태어날 때 회복탄력성이 낮았으면 앞으로도 회복탄력성이 높아질 수 없어?’


물론 아닙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레빈은 B = f{P,E} 라는 방정식을 주장했습니다. 개인의 행동(Behavior)은 고유한 기질(Person)과 사회적 환경(Environment)의 상호작용으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고유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 코드가 고유한 기질을 만들어 냅니다. 동시에 유전자는 외부 환경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며 발전합니다. 특히 초기 경험(가족이나 지역사회 지원 및 자라면서 겪은 역경, 위협 등의 경험)은 그 사람을 형성해가는 데에 큰 영향은 미치죠.

유전자가 피아노 건반이라면 환경은 피아노 건반의 음질과 밸런스를 조정하는 이퀄라이저입니다. 이 둘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온전한 피아노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만약 회복탄력성을 APGAR 척도로 어느 정도 예견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노력을 배분해야 할지, 어떤 부분에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계획할 수 있습니다.

APGAR 점수가 높은 아이는 비교적 스트레스 상황에도 버틸 수 있는 근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좌절하더라도 금방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아픔을 딛고 발전할 수 있도록 충고와 조언을 해주는 게 더 필요합니다.

반면 APGAR 점수가 낮은 아이는 스트레스 상황에 무력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실패해도 안정감을 느끼도록 도와야 합니다. 따스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죠.


이제 여러분이 답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어땠나요? 선천적인 탄력성이 있나요? 그렇지 않나요? 그럼 여러분의 성향에 맞는 유년 시절을 보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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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회복탄력성을 쥐어 줄 4가지 요소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피터 크라프 교수는 정신적 강인함에는 4개의 ‘C’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첫 번째는 도전(Challenge), 두 번째는 계획 완결력(Commitment), 세 번째는 자기 통제(Control), 네 번째는 자신감(Confidence) 입니다.

이 ‘4C’가 바로 당신의 삶에 회복탄력성을 쥐어줄 핵심입니다.

회복탄력성을 갖춘 사람은 자신 있게 무언가를 시작합니다. 필요한 목표에 초점을 기울이며 유혹을 견디고 자신의 생활을 통제할 힘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목표를 완수해내며 일련의 과정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어떤가요? 유능하고 씩씩해 보이지 않나요? 멘탈이 강하기 때문에 그는 눈 앞에 즐거움이 있건, 고통이 있건 상관 없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부 요인을 아무리 갖추어도 내부 요인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흔들립니다. 외부 요인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내부 요인이 탄탄하다면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외부 요인 역시 그에 응합니다.


누르고 있던 용수철을 놓으면, 튕겨지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용수철을 누를 수 있죠.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나를 누를 일도, 당길 일도 생깁니다. 내 마음이 탄력 있는 용수철과 같다면 고통으로 성장하고, 시련을 오히려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회복탄력성을 삶의 무기로 사용하고 싶나요? 튼튼하게 연마할수록 용수철의 탄성 한계가 커지는 것처럼 시련을, 절망을 즐기세요.

지나치게 큰 힘으로 인해 탄성 한계에 도달하면 어떻게 하냐고요? 망가질까 봐 겁이 난다고요?

뒤에 소개할 무기를 함께 갖춘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회복탄력성을 챙겼다면 이제 새 무기를 찾으러 떠나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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