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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본 지 오래

[단편 소설]

(자신 없는 듯 주저하며) "그럼 김치찌개 먹을까?"


"그럴까? 오빠 먹고 싶은 거라면 나도 좋아!"

<SYSTEM> 이 말의 신뢰도는 24%입니다.


 지훈은 고연의 정수리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24%면 거짓말이라는 거잖아. 대체 이 여자는 뭘 먹고 싶은걸까? 


<SYSTEM> 피곤함이 67% 상승했습니다. 분노할 확률이 7% 올라갑니다.


 아차! 이 망할 놈의 시스템이 이런 상태를 읽을 지 모른다. 지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흔들었다. 그리고 고연의 정수리를 다시 보았다.


<SYSTEM> 불쾌함이 197% 상승합니다. 표정이 굳습니다. 장소를 이탈할 확률이 33% 증가합니다.


 시스템 문구를 보니 이미 늦은 것 같다. 일부러 정기 업데이트도 미뤄가며 구버전 쓰고 있는데 헛소용인 모양이다. 0.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신경망 스캔을 하는 이 빌어먹을 시스템을 어떻게 속이겠는가.


 아이가 태어나면 엉덩이를 때려 숨을 틔인 뒤 아직 유연한 두개골 중앙부 깊이 칩을 심는 게 상식인 세상이 되었다. 편도체에 자리 잡은 채 죽는 날까지 함께 할 그 칩의 이름은 '777'이었다. 인류의 구원이고, 소통의 대혁명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그 이름은 전 세계적 범용성을 바탕으로 금새 지구촌을 장악했다.

 칩은 매순간 신경망을 스캔하여 실시간 감정 상태를 외부로 공유한다. 혈액을 동력으로 쓰기에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아이를 기르는데 서툰 초보 부모에게 이는 혁명이었다. 정수리에 뜨는 반투명 LED 화면에는 그 아이의 정확한 욕구가 적혀 있었다. 기저귀가 축축한지, 배가 고픈지, 잠투정인지 명확해진 부모님은 더 이상 아이의 울음에 당황하지 않았다.

 체면 문화는 옛날 교과서에나 나오는 개념이 되었다. 욕구를 숨길 수 없고, 숨기려 한들 성공할 수 없는데 무슨 체면인가. 사람들은 솔직해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 집에 갈래!"


고연이가 벌떡 일어났다. <SYSTEM> 불쾌 지수 76%


"아냐. 오빠가 잘못했어. 배가 많이 고파서 메뉴를 좀 빨리 결정하고 싶었나봐. 고연이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못 믿겠으면 얼른 확인 해봐."


지훈은 필사적으로 '진심! 진심!' 속으로 외쳤다. 배가 고픈 건 사실이다. 시스템도 진심이라고 띄워줄 것이다. 그래야한다. 제발! 


<SYSTEM> 불쾌 지수가 상당 부분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여분의 화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작합니다.


화가 멎었다는 시스템 문구에 안도를 하기도 잠시, 고연이의 뾰루퉁한 목소리가 지훈의 귀를 찔렀다.


"오빠는 나랑 있는 게 귀찮아? 빨리 가고 싶어? 내가 뭘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이런 건 궁금하지도 않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잘못했어. 화 풀어~!"


그녀의 물음에 재빠르게 손을 저었다. 시스템 상 그녀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서러운 마음으로 칭얼대는 상태였다. 이럴 땐 마냥 받아줘야 한다. 그러라고 시스템에 나와있다. 퍼센테이지가 가장 높은 해결 방법을 택해야 가장 안전하다.

지훈은 순간 뒷목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데이트하러 나설 때면 종종 그랬는데, 오늘은 더 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연애인지 면접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시스템에 반영될라.

그녀의 정수리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가 끝났다. 고연을 바래다주고 지하철을 탄 그는 지하철에 빼곡히 적힌 LED를 피해 안전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양하지만 대개 비슷했다. 피곤, 짜증, 불쾌, 분노 등 퇴근길에 으레 보아왔던 문구가 지하철 공기를 수놓았다. 내 시스템도 저들과 마찬가지일까? 문득 궁금했지만, 본인의 시스템은 볼 수 없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금새 포기했다.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정수리 문구를 읽더니 이상이 없음을 알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안도했다. 특이 사항이라도 적혀 있다면 오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고해야 했으니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방에 들어와 드러누웠다. 주인이 왔음을 알고 방 내 싱크로 시스템이 지친 지훈의 알고리즘 상 가장 볼 법한 영상을 켜주었다. 시끄러운 분위기가 아니었음 좋겠다고 생각한 덕인 지 음량도 작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다보니 재밌었기에 한참을 보았다.


문득

'어? 저 배우가 저렇게 예뻤나?' 싶었다. 카메라에는 시스템 화면이 잡히지 않으니 자막에 집중하게 된다. 자막이 없는 찰나 배우의 얼굴이 새삼 보였다.


지훈은 문득 여자친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하도 안 봐서 가물가물했다. 그러고보니 엄마 생김새도 본 지 꽤 되었다.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시스템 내 폰트 변환 없이 기본 서체를 쓰는 엄마여서 밖에 나가면 가끔 어딨는 지 잃어버리기도 했었다.


배우 정면 샷이 클로즈업 되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배우 때문에 눈이 마주쳤다. 소름이 돋았다. 마치 벌거벗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눈이 마주친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고전 문학에서 보고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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