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남의 얘기가 아니잖아요.

오른쪽 차선 #011.

필자는 상담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 최후까지 남아야 할 학문을 묻는다면 종교학교육학을 들 것이다.
종교가 주는 것은 '같이'의 가치이다. 비록 그릇된 해석과 믿음으로 여러 눈살 찌푸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일부가 있지만 그건 개인의 욕심 탓이다.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의 본질은 종류를 막론하고 '사랑'이다. 종교가 남아있음으로 사람은 인간으로써의 감성과 신성함을 유지할 수 있다.
교육이 주는 것은 '사고하는 힘'이다. 정보와 가치를 알아가는 일, 그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은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만들어주었다. 지적으로 고도 발달한 인간이 지구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만 봐도 이는 자명하다.

다소 무겁게 시작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인간은 아는만큼 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 한다. 관점의 지평은 넓히면서도 답의 영역은 한정하지 않는 열린 환경. 가급적 답을 찾는 활동보다 질문을 찾는 활동을 해야 한다. 내가 느낌표를 주기보다 물음표를 주는 강의를 지향하는 건 이런 신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래서 상담을 할 때도 이런 지향점을 확고히 잡은 상태로 임한다. 예전에는 그냥 끝없이 공감하고 독려하면 스스로 알아가고, 찾아가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할극을 진행할 때도 그 순간 느끼는 바가 무엇인지, 상대방은 어떻게 느낄 지를 중심으로 봤다. 이건 스스로 물음표를 띄울 수 있을 인지 수준이 되는 이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물음표를 가지지 못 할 정도로 기본 개념이 약한 이들이 있다. 특히 요즘같이 생각하는 일 자체를 노동으로 여기는 때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요즘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갈 때는 경청 하나만 들고 가지 않는다. 주지시킬만한 메시지 하나 정도는 쟁여두고 움직인다.

서론이 길었다. 이건 최근에 쟁여뒀던 메시지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다. 학교폭력예방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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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심각해보여도 그들에겐 심각하지 않다.

어른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아이들이 하는 욕에 욕 자체의 악의적인 뜻과 표현이 들어있다고.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욕이 생동감 넘치게 살아움직이는 나라가 있을까?

우와, 씨발! 졸라 멋있어! [감탄]
아! 씨발! [놀람]
ㅋㅋㅋㅋㅋㅋㅋ씨발 [즐거움]
하... 씨발... [허무]
야! 이 씨발놈아!! [분노]

같은 말이지만 그 쓰임은 무궁무진하다. 이 예시는 새발의 피지...

하여튼 청소년이 인지하는 욕과 어른이 인지하는 욕은 출발점이 다르다. 다른 상태에서 아무리 "그거 나쁜 거다. 그만 해라.", "하면 벌점 준다." 라고 얘기해봤자 들어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별 뜻 없이 하는 건데요?" 라고 하면 할 말 없다. 실제로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은 언어폭력에 해당한다. 왜 그럴까?

흔히 대화의 개념을 '나와 상대방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파고들면 그 이상의 복잡함이 있다. 대화의 완성은 화자(말한 사람)가 아니라, 청자(듣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린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나의 의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인식할 지도 따져봐야 한다.
너무 팍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장에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까지 신경쓰면서 얘기를 하나? 그렇게 따지다보면 하고 싶은 말 아무 것도 못 하는 거 아니냐고 불평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야, 나 어제 엄마가 돈까스 사준다고 했거든?
근데 그래놓고 데려간 곳이 병원인 거 있지?
결국 어제 치과 치료 받느라 죽는 줄 알았잖아.
엄마는 왜 맨날 이렇게 자식한테 사기를 치냐?
나도 다른 집처럼 잘 해주고
용돈도 많이 주는 엄마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 충분히 할 수 있다. 돈까스를 빌미로 자신을 치과로 데려간 엄마에 대한 소소한 분노를 한탄한 것이다. 듣는 상대방도 "아이고, 너무했네. 우리 돈까스 먹으러 갈까 그럼?" 정도로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실제로 엄마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이 대목을 듣던 중학생 아이들이 "어우..." 하면서 소름 돋아했던 것을 보면 이 글을 보는 당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느껴지는 무게가 사뭇 달라졌을테다.

이런 거다. 대화의 완성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선이 아닌, 상대가 그걸 어떻게 인식하느냐 까지다. 그런데 솔직히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가?
공격적이고 상스러운 표현일 수록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여지가 크다. 욕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친한 친구들끼리 서로 욕하면서 노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표현이 입에 익어져서 일상 생활 전반에 노출되다보면, 아무리 의도가 없었어도 걸려 넘어지는 이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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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가해자는 사이코패스인가요?

아이들에게 묻는다. 나중에 학교 폭력 가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장난으로 손을 드는 친구도 있지만, 시선이 향하면 킥킥대며 손을 내린다. 지금껏 진심으로 손을 든 아이를 본 적은 없다. 이는 다들 옳고 그름은 알고 있다는 뜻이므로 매우 반가운 일이다.
질문을 바꿔본다. 혹시 지금까지 학교 폭력을 해봤거나, 당했거나, 주변에서 접한 적이 있냐고.
여기엔 학급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손을 든다. 물론 손을 들지 않았으나, 실제로 접해본 아이들도 있을테니 거의 3/4 정도는 학교폭력을 접했다고 할 수 있다.
자, 인지 부조화 현상이 일어났다. 학교폭력을 하고 싶은 애는 없는데, 학교폭력은 이렇게 많은 이에게 노출이 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일부 문제인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기에 학교폭력은 너무 만연해있다. 교육청에서 아이를 하나씩 검열 후 학교마다 가해자를 한 명씩 배치하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일부 문제 있는 아이들을 컨트롤하면 되는가? 그런 방관적 접근은 위험하다. 어쩌다보니 학교폭력 가해자를 만드는 그 시작점. 그건 바로 '장난'이다.
학교 생활, 또래 관계는 장난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함께 웃고 떠들고 가끔씩 미친 짓도 하면서 그것을 추억으로 기억한다면 학창 시절의 봄 볕처럼 따사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 장난이 누군가에겐 장난이고 누군가에겐 기분이 나쁘다면? 이 불균형이 학교 폭력의 불씨가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장난을 친 사람과 장난에 기분 나쁜 사람, 둘 중에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있을까? 애매한 문제다. 각자의 입장에서 할 얘기와 명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각자 역할에 대한 가치판단보다 각 역할이 느끼고 있는 느낌과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역할극을 통해 직접 경험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장난을 치며 괴롭히는 일은 매우 재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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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겨나는 건 없다. 조금씩 개발될 뿐.

모든 학교 폭력이 장난이냐?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장난이 학교 폭력의 첫 계단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무리 찝찝한 일도 웃음과 함께라면 할 용기가 생긴다.
장난이 익숙해지면 기존 장난보다 더 자극적이고 재밌는 장난을 기획한다. 같은 것만 하면 금방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장난의 강도가 커지면 모두에게 하기는 애매해진다. 슬슬 심한 장난을 쳐도 될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떤 사람이 그럴까? 유별나거나, 다수가 싫어하는 무언가를 지닌 이가 그 타겟이 된다. 찌질한 것은 매우 좋은 명분이 된다. 합리화의 단계다.
합리화가 들어가며 점점 무감해진다. 장난의 수준을 넘는 행동이 하나 둘 들어간다.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부모에게 배운 폭력, 무리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별난 행동이 늘어간다. 당할만한 이유가 있는 애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그 정도를 넘기 위해선 상대방이 나와 동등한 인간이면 안 된다. 비인간화가 시작된다. 사람이 아닌 심부름꾼, 노예, 샌드백, 지갑 등이 된다.
어느 덧 아주 훌륭한 한 폭의 학교 폭력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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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예방교육을 하면 피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모두 깔깔깔 웃는다. 만들어진 가공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웃음이, 장난이 조금씩 커지다보면 학교 폭력이 된다는 점, 학교 폭력이 멀리 있는 게 아닌 이유는 나도 느끼지 못 하는 사이에 내가 그 중심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직면을 시킨다. 다들 표정이 창백해지며 분위기가 무거워지곤 한다.


애들도 다 안다.

애들도 다 안다. 학교폭력 나쁘다는 거.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면 안 된다는 거. 학교폭력 피해자가 많이 괴롭고 무기력하다는 거, 학교폭력을 목격했다면 피해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거. 도덕 시간에 다 배운다. 아니, 배우기 전에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학교폭력 가해자를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상정하고, 행위 자체를 욕하고 막아봤자 실효성이 없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 고고함이 어딨겠는가. 그리고 오히려 이런 교육이 그들에게 더욱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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