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한 문장, 내뱉은 고백
사랑, 사랑
글로 쓰기에 좋은 말이 있고
말로 하기에 좋은 글이 있다.
사랑, 사랑이 그렇다.
어떤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 곁에 있어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
진정 사랑이다.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할 때에도
내 곁에 있어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자.
시야가 트인 길에서 빈 들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리 복잡하거나 두렵지 않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자.
여기
말로 하기에 좋은 글이 있으니
사랑, 사랑이 그렇다.
우리들이 헤쳐 가는 이 세상에는
글로 쓰기에 좋은 말들로 가득하지만
사랑은 참, 말로 하기에 좋은 글이다.
[읽지 못한 문장, 내뱉은 고백]
서점 귀퉁이, 나는 원고지 위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종이 위에서는 참으로 근사한 단어였다. 획의 굵기나 잉크의 번짐에 따라 그럴듯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네려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턱턱 막히곤 했다. 내게 사랑은 글로 쓰기엔 참 좋지만, 입 밖으로 내기엔 너무 무거운 '글'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은 복잡한 미로 같았고, 홀로 그 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아누웠을 때, 말없이 죽을 끓여 문 앞에 두고 가던 사람이었다. 내가 세상의 필요에 대답하지 못해 숨어버리고 싶을 때에도, 그녀는 그저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또 원고만 보고 있네. 저녁은 먹었어?"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문득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음 한구석이 환해졌다. 시야가 탁 트인 빈 들판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방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세상의 복잡함과 두려움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내 앞의 그녀였다. 나는 적어 내려가던 원고지를 덮었다. 종이 위에 박제된 화려한 수식어들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랑은 활자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숨결을 실어 보내야 비로소 생명이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침묵을 깨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있잖아, 사랑해."
글로 쓰기엔 그토록 어렵고 복잡했던 문장이, 말로 내뱉자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명쾌하게 공기 중으로 번져 나갔다. 세상엔 글로 쓰기에 좋은 말들이 참 많다지만, 사랑만큼은 직접 목소리에 담아 건네기에 가장 완벽한 '글'이었다.
내 고백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에, 우리는 비로소 이 험난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갈 진짜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