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역에서 꿈을 꾸었을까?
미리의 시간 epi. 1
구름이 거의 없는 초겨울 오후 햇살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들쭉날쭉 솟아오른 빌딩들 사이를 채운 것이 햇살 뿐은 아닌, 뭔가 신기한 다른 것이 더 섞여 있어야 말이 될 것 같은 그런 날.
샤워를 막 마친 미리는 대충 파자마 위로 타올지로 된 두툼한 목욕 가운을 걸쳐 입고 발코니로 나갔다.
미리는 발코니 전면을 가로막고 있던 색이 약간 바란 오래된 갈색 버티컬을 젖히고 바깥 풍경을 봤다.
멀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아래로 훑어가며 천천히. 오래오래.
사람의 시야각은 새보다 좁다.
이억 년 가까이 지구를 종횡무진 누비며 살아온 최상위 포식자 공룡은 지금은 아주 연약해진 새들을 직계 후손으로 남기고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새들은 먹이를 찾기 위해, 혹은 포식자로부터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시에 좌우를 훑어보느라 연약한 목이 언제나 바쁘다.
연약해져 버린 새처럼 최대한의 시야각을 확보하려면 사람도 눈이 양쪽 귀쯤에 있어야 했을까.
사람의 얼굴에서 두 눈을 양쪽 귀보다 살짝 위로 옮겨 붙인 얼굴을 상상하니 역시 낯설고 괴기하다.
사람처럼 편평한 얼굴을 가지고 있거나 두 눈의 간격이 비교적 가까운 동물들은 새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대신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릴 수 있다.
미리는 눈의 피로를 푸는데 좋다는 눈동자 굴리기를 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지만 물체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눈만 쉬이 피로해진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오래오래 째려볼 수 없게 만들어진 안구에 붙은 근육이다.
미리는 풍경을 훑어보며 이번엔 외눈박이 외계인을 상상해 본다.
사람에게도 눈이 하나뿐이라면 그 눈은 엄청 커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다.
눈이 그렇게 커지려면 두개골 용적도 커져야할 텐데. 그럼 목도 굵어져야 할 텐데. 그다음엔 척추의 굵기와 구조까지 생각을 이어가다 미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들, 심지어 물고기나 곤충들도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뇌에 더 많은 용적을 허용하고 자신은 더 넓은 시야각을 가지기 위해 작지만 두 개의 시각기관으로 합의를 봤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전파망원경처럼.
전파망원경은 지름이 굳이 거대하지 않아도 된다.
곤충처럼 여러 개의 전파망원경을 한 자리에 모아놓거나, 멀리 떨어진 두 서너 개의 전파망원경을 연결하여 각각의 정보를 합치면 서로 떨어진 거리만큼 거대한 하나의 전파망원경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시광선을 이용하는 생물체의 시각기관은 이를테면 볼록렌즈와 구형의 광학스크린을 갖춘 극장과 같다.
어이없을 정도로 작은 시각기관에 터무니없이 큰 세상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볼록렌즈가 필요하다.
볼록렌즈는 초점거리 안에 있는 물체는 크게 확대시키지만 초점거리 밖의 물체는 뒤집어서 확 줄여준다.
세상 모든 풍경들은 안구의 아주 작은 볼록렌즈의 초점거리 밖에 있으므로 볼록렌즈 모양의 수정체에 의해 확 줄여져서 뒤집혀져 망막이라는 구형 스크린에 거꾸로 비친 채 전기신호로 바뀌어져 대뇌로 보내진다.
광학영상을 보는 관객은 그 누구도 없다. 영상관의 주인조차 망막에 비친 영상을 감각할 수 없다.
다만 두 개의 눈동자를 통해 중첩 확보된 영상의 전기신호가 뇌에서 보다 선명한 시각정보로 인지될 수 있으므로 두 개의 눈은 광학망원경을 거친 전파망원경의 기능을 가진 셈이다.
'망원경이라니. '
미리는 결국 우찬을 떠올린다.
왜 모든 생각의 끝은 꼭 우찬에게로 향하는지.
그러니 ‘도대체 어쩌라고’ 싶은 마음에 목욕가운 자락을 움켜쥐고 끌어올려 아직 물기가 남은 짧은 머리칼을 사정없이 문질러댄다.
미리의 짧은 머리카락들이 함부로 나풀대며 잠시 길어진 오후 햇살에 반짝거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햇살이 좋을 때 무작위로 정한 어느 공간을 들여다볼 작정이다.
미리의 거실은 소위 시티 뷰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떤 집보다 막강한 시야를 지니고 있었고 당연히 이 집을 얻기 위해 무리를 해야 했다.
보증금은 이억에 월세 백이었다.
미리의 월급은 실 수령액이 이백이 겨우 넘었다.
오랫동안 마이너스통장에 끄달려 다니다 겨우 불을 끈 후로 대출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 집을 얻을 때, 오래 묵혀두었던 전전 직장 조합의 공제금을 깼고, 신차로 구입해서 오 년 동안 정 들였던 차도 중고차로 넘겼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부스러기 예적금들도 다 털어서 보태느라 이 집을 얻고 나서는 여유자금이라곤 한 푼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리에게 집의 가치는 전망의 가치였다.
‘전망을 갖는다는 것’은 미리가 ‘관찰할 수 있는 풍부한 대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시에 뭔가를 ‘관찰하는’ 아니, ‘들여다보는 행위’가 절대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숨어있기도 한다.
그런 집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런 집을 구할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여다보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훔쳐본다.’고 표현 당해도 싼 일이다.
어느 한 대상을 포착하고 그걸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생산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다.
경제적 이익이 없으니 취미라고 단정할 수도 있겠지만 취미라는 용어가 갖는 가벼움이 싫어서 미리는 그저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스토킹도 아니었다. 관찰 대상이 언제나 일시적이고 계속 바뀌었으므로.
‘관음증인가?’
미리는 관음증이라는 어휘에 붙어 다니는 성적 음란함이 떠올라 불편했지만 심리학적 의미로 사용하는 관음행위라면 인정하기로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도 일종의 관음행위라면 미리의 관음은 아주 건조하고 무료하며 맹숭맹숭한 ‘짓’이었고 동시에 당당하게 드러낼 수도 없는 ‘짓거리’로 폄하될 수도 있다.
사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볼 수 있는 그 뮌가는 주로 하늘, 구름, 나무 같은 주인 없는 대상이겠지만 미리의 관찰 대상은 주로 '주인이 있음에 틀림없는' 자동차들이었다.
확보된 시야의 한쪽에 나타난 자동차가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는 게 미리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미리가 보는 세상은 게임 속 세상과 달라서 왼쪽 끝으로 사라진 자동차나 사람이 오른쪽 끝에서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무엇이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었고 사라진 다음의 궤적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가끔은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기도 했다.
어쩌다 누군가 다가와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다음 차의 앞머리와 궁둥이를 이리저리 틀어서 주차 열을 탈출해 이동하는 것을 보거나, 빈 차인 줄 알았는데 차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내리고 다시 뒷문을 열어 뒷좌석에서 짐 꾸러미를 꺼내어 들고 가는 걸 보는 날엔 천 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소확행의 날이었다.
높아봐야 오륙층의 빌라 옥상들을 탐문하듯 훑어보며 주로 아이스박스나 고무대야 등으로 이루어진 옥상 텃밭에 심은 야채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비 온 후에는 네모난 나무 화분의 꽃들이 또 얼마나 무성하게 피어나는지 보기도 했다.
커다란 적갈색 고무 통에 심은 대추나무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리기는 했는지 확인했고 더러는 포도나무 넝쿨 사이에서 잘 익은 포도송이를 발견하며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리를 긴장시키고 행복하게 하는 건 어느 빌딩의 사무실을 운 좋게 들여다보는 경우였다.
교대근무 때문에 쉬는 날은 밝은 낮에 카메라 앞에 앉아있을 수가 있다. 밝은 낮엔 건물 안의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더러 시트지도 안 붙은 투명한 유리창을 가진 낡은 건물의 사무실이 있다면 칸막이 쳐진 책상들 사이로 앉아있거나 일어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볼 수 도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는 것은 언제나 미리를 아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들은 살아있고 뭔가 바삐 저마다의 할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미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들을 몹시 흥미롭고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미리 역시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편안하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을 미리는 좋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꽤 상당한 거리가 필요했고 망원렌즈가 달렸지만 몸체가 무겁지 않은 카메라가 필요했으며 카메라에 얼굴을 파묻은 미리의 모습이 눈에 띄어서도 안 되었다.
무엇이든, 누가되었든 잠깐이나마 뭔가를 볼 때 그 시간을 미리는 '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또는 '숨 쉬는 시간'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미리의 ‘그 시간’들을 알게 된다면 미리를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일종의 변태처럼 판단하기 딱 좋은 ‘그 시간들’을 미리는 어쩌면 ‘그저 잠깐 신이 되는 시간’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들여다볼 뿐인 관찰자로서의 ‘신의 한 영역’에 잠깐 들어서는 시간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