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시간 epi. 3
미리의 모든 시간들이 항상 그렇게 빠르게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 마냥 박제되어 절대로 흐르지 않는 정지 시간이란 게 미리에게 왔었다.
가을이었다.
성숙해진 대도시의 가을은 풍성한 빛과 색의 축제였다. 거리에도, 빌딩의 바다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솟은 작은 언덕들에도, 미리네 아파트 뒷산에도 여름의 초록을 밀어내기 시작해서 드디어 승리하는 짧은 한 때, 온갖 색들이 빛을 내는 그림 같은 계절이었다.
그날 미리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식사용으로 사들고 온 통밀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웠다. 평소처럼 얼 그레이 티백을 우려낸 머그잔에 따듯하게 덥힌 우유를 부어 들고 거실 창가에서 서성댔다. 차를 호로록 거리며 마시는 동안 일몰이 아직 삼십 분쯤 남았음을 가늠했다.
산을 아직 넘어가지 못한 가을 햇살이 도심 여기저기 뭉쳐있는 단풍 든 나무들 사이에서 긴 파장으로 반사되어 거실에 걸린 알버트 비어슈타트의 '요세미티의 일몰'이라는 그림과 거의 같은 명도와 같은 채도로 빛나고 있었다.
미국의 서부지역과 허드슨 강 주변의 광활한 대자연을 주로 그렸던 비어슈타트의 그림을 미리는 좋아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아서 대자연 속 한 그루 나무 같은 혹은 한 마리 사슴과 다르지 않았다. 그림 속 인물들이 화가에 의해 통제되고 간섭받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 구도의 자유로움이 좋아서 미리는 그의 복제 작품을 두 개나 사 가지고 왔었다.
산을 등진 동향 아파트는 늦은 오후 아직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전에 밖을 바라보는 데 이점이 있었다. 역광은 얼굴을 감추기에 맞춤이다. 동향의 고층은 언제나 미리가 선호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미리는 빈 머그잔을 싱크대 개수통에 집어넣고 집 안을 돌며 화장실과 주방 싱크대 조명까지 모두 껐다.
발코니에 자리를 잡고 앉기 전에 진한 갈색 버티컬을 두세 칸 정도만 남겨두고 닫았다.
여고시절 이과반 교실의 암막커튼이 만들었던 딱 그 정도의 공간이 생겼고 미리의 집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빛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었다.
미리에게는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가정집을 들여다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는 원칙이 있었다.
그건 도덕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그녀에게 금기였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분별심을 만들 수 있고 그건 평온한 모든 것을 흩으러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미리의 삶에 깊이 배어있었다. 그런 두려움은 미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벽이기도 했다.
미리의 집은 투 베이의 판상형 아파트로 15층 아파트의 10층 3,4 라인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규칙적으로 배열된 같은 규격의 불 꺼진 거실들 중 하나일 것이었다. 완벽한 대칭성이 존재한다고 믿을만한 위치였다.
축제가 진행 중인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 속에서 그저 이리저리 사람들의 흐름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광장엔 사람 대신 대칭성으로 가득 차서 거기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특별함은 사라진다. 한 사람쯤 들어내어 광장의 다른 곳에 이동시킨다고 해도 광장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미리는 그 많은 아파트 거실들 중에 하나를 뽑아서 다른 층의 다른 칸에 바꿔 넣는다고 해도 절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대칭성이 충분한 그런 곳으로 늘 숨어들었다.
한동안 차를 몰고 다니며 사찰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산속 깊이 자리 잡은 사찰들의 공통점은 가는 길은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절집 마당에 서면 거짓말처럼 바깥세상이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집을 얻으러 다니다가 앞이 툭 트인 고층 아파트 맨 앞동에서 미리는 산중 사찰같은 집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개미집으로 들어서는 미로 같은데 들어가서 바깥을 바라보면 너무나 관대하게 온 도시를 보여주는 산중 사찰 같은 그런 곳.
미리는 이사 다닐 때마다 인터넷 지도를 훑어보며 동네를 찾았고 항공샷과 스트릿뷰를 참고하고 발품을 팔다 결정하면 언제나 결국은 앞이 툭 트인 산동네 아파트였다.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는 낮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면과 평지는 주로 택지와 상가였고 그 구역을 지나면 8차선 대로가 나왔다.
8차선 대로 너머에는 산동네와는 다른 신축의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단지가 다른 세상처럼 버티고 있었지만 이쪽으로는 낡고 낮은 빌라들과 꼬마 빌딩들이 산사면의 경사를 따라 물결치듯 펼쳐져 있었다. 고도가 낮은 빌라구역의 가운데쯤 오른쪽으로 기독교 관련 신학대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대학의 긴 담장은 이층높이의 축대 위에 성벽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빌라와 꼬마빌딩들이 있는 구역에는 주차장이 부족하기 마련이라 담장 밑으로는 거의 모든 날 모든 시간 자동차들이 줄줄이 주차되어 있었다.
마침내 미리가 덤덤하게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고 자동차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양이가 그려진 베트남산 나무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 렌즈에 왼쪽 눈을 들이대고 주정차구간 쪽으로 삼각대의 수평 각도를 조정하며 옮겨가던 그때, 그 길 옆 붉은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아이보리색 타일을 붙인 신축 오피스텔의 꼭대기 층의 창 안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보였다. 그 남자의 창은 미리네 아파트 쪽을 향하고 있었고 열린 창 가운데 보이는 남자는 뭔가 기다란 원통형 물체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남자의 행동이 잠시 멈칫하는 듯 보였다.
‘저건 망원경인데.’
미리 역시 흠칫했다. 마치 서로 바로 코 앞에서 얼굴을 마주친 것같은 느낌이었다. 미리가 카메라를 들이대기 이전부터 그가 미리가 있는 곳을 보고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불가능해야 했다.
미리가 사람을 관찰할 때는 아주 먼 거리의 사람이어야 했다. 절대로 미리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리의, 아주 작아서 윤곽이 불분명한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정도여야 했다. 절대로 미리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에 있어야 했다.
자신을 관찰하는 존재를 깨닫는 순간 관찰되는 사람도 관찰하는 사람도 더 이상 편안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건 파동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미리는 더 이상 이전의 미리일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인 광장에 들어서면 미리는 자신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뚝딱거려진다는 걸 깨닫곤 했다. 빌딩이란 미리에게는 관찰하고 싶은 수많은 창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눈을 가진 관찰자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 많은 창 중에서 누군가 단 하나의 창을 통해서라도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미리를 콕 찍어 단조롭고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걸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미리에게 그런 생각은 피할 수 없는 인과이자 업보였지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미리는 거리를 걷거나 광장에 들어서는 걸 꺼리게 되면서 차라리 수많은 인파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걸 선택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모든 설정 값이 흐트러졌다. 톱니바퀴의 어느 항목에서 값이 흐트러졌을까. 시간이 잠시 멈춘 것처럼 미리도 남자도, 아니 온 세상이 잠시 고요하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아주 긴 정적 같은 시간은 사실 십 초도 채 되지 않았다.
원격조정처럼 정적을 깬 것은 남자가 먼저였던 것 같았다. 아직 얼어붙어있는 미리를 향하고 있던 남자의 몸과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기다란 원통형 물체 옆으로 남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서서 남자는 계속 미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 거꾸로 씌워진 하얀 캡이 어스름해져 가는 여명 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남자가 계속해서 미리 쪽을 보는 것을 느끼는 순간 미리는 의자 다리를 누가 발로 건드린 것처럼 무게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카메라 삼발이가 그녀의 발에 걸려 넘어졌고 카메라에서 망원렌즈가 분리되면서 물을 주느라 발코니에 내놨던 유리로 된 고사리 화분으로 떨어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나는 것처럼 들렸다. 미리는 겨우 일어나 서둘러 버티컬을 다 닫아버리고는 난장판이 된 발코니를 치우지도 못하고 겨우 거실로 들어왔다.
난공불락인 그녀의 요새가 들통난 것 같은 두려움이 미리에게 몰려왔다.
밤이고 낮이고 하루에 두세 번씩 위급하게 들려오던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바로 지금, 바로 옆에서 들리기라도 하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빙빙 돌며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미리는 가볍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소파에 쓰러지듯 모로 누웠다.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내 쪽을 보고 있다고, 꼭 나를 봤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망원경이 아닐 수도 있어.’
합리적 의심을 만들어가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로 미리의 발코니 창은 한동안 갈색 버티컬로 봉인되었다. 거실엔 주광색 형광등을 켜지 못했고 홈쇼핑으로 사서 조립만 해놓고 쓰지 않던 대나무살 커버의 스탠드 등이 노랗게 구석을 밝히는 정도였다.
한 달 가까이 가슴만 벌렁거리며 체중이 빠져가던 미리는 결국 이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집을 내놓기 위해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 갔다가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도, 미리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보았던 그 찰나의 순간이 미리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상황이었는지. 그건 절대로 로맨틱한 드라마 같은 순간은 아니었다.
부동산 중개사무실은 팔차선 대로로 나가는 빌라단지 쪽에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미리가 비탈진 보도의 코너를 돌아서 부동산 중개 사무실 입구의 데크로 발을 디딜 때쯤 한 남자가 검은색의 기다란 소프트 백을 어깨에 메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남자는 사무실과 안면이 있었는지 그가 들어서자 사무실에 있던 두 명의 공인중개사 중 한 명이 오피스텔 이름을 말하며 반갑게 아는 체했고 다른 한 명의 중개사는 미리가 들어서자 아파트 이름을 말하며 오셨냐고 환영인사를 했다.
남자의 오피스텔은 그 구역에서 보기 드문 신축이었고 일본에서 건축 실무를 하던 업자가 실용적이고 고급지게 설계하고 시행했다고 플랫카드를 오랫동안 걸어놨던 터라 미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오피스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미리는 그날 부서진 카메라 망원렌즈를 수리하기 위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갔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입었던 빨간 브이넥 스웨터를 두껍게 퀼팅된 롱 패딩 안에 입고 나갔다. 남자 역시 망원경 가방이 틀림없는 길고 묵직한 검은 가방에 무엇보다 그날 쓰고 있었던 하얀 캡을 똑같이 뒤로 돌려서 쓰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망원렌즈에 잡힌 상대방들의 모습에서 빨간 스웨터와 하얀 캡은 어떻게 해도 혼동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한 여름도 아닌 가을에 하얀 캡이라니.
살짝만 봐도 눈에 띄는 채도 높은 빨간색 스웨터라니.
"다음에 다시 올게요"
누가 봐도 뭔가에 놀라듯 크게 당황한 미리는 말끝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뒤돌아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미리는 데크 아래로 내려와서 다섯 걸음도 떼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마음이 얼어붙으면서 발걸음까지 길바닥에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미리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남자가 매물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출입문을 밀고 나와 단호한 발걸음으로 미리에게 다가왔다. 잠깐 열린 사무실 문 너머로 중개사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남녀의 순식간의 들고나감을 일어서서 보고 있었다.
그들도 잠깐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지만 영문을 알기 위해 서두르지는 않았다. 중개할 매물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당분간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매물이 되어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방금 나간 남녀를 보던 그들은 다시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저 아시는 거죠? 저는 알겠거든요.”
“맞죠.”
남자는 묻는 것도 아니고 안 묻는 것도 아닌 어조로 말을 건넸다.
“거기, 101동 1003호 갈색 버티컬이요.”
하얘졌던 미리의 머릿속이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도망가도 두 걸음도 못 가 넘어질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무슨 얘길 할지 들어봐야 할 참이었다. 미리의 손이 카메라 가방 끈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하얗게 변했다.
“저는 알바로 오피스텔 관리를 맡고 있어서 일 때문에 나온 건 데 그쪽은 왜 집을 내놓으셨어요? 아직 기간 남았다면서요.”
‘그걸 물어보고 나왔다고?’
미리가 입이 싼 부동산 중개사를 머릿속에서 탓하는 동안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 이후로 거실에 불이 켜진 걸 못 봤어요. 버티컬도 항상 닫혀 있고.”
남자는 잠시 텀을 두고 숨을 골랐다.
“저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뭔가 무서워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됐었거든요.” 창백해진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던 미리 곁에서 남자는 천천히 그러나 에두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들은 어둑한 교실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광선검같던 빛처럼 곧바로 날아와 미리를 둘러싼 투명하고 완고한 껍질들을 좌슥슥 우슥슥 베어내고 있었다. 미리는 잠깐 동안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남자는 마른 몸매에 동그란 얼굴과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달지 않은 둥근 카스텔라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어려 보인다는 생각을 순식간에 하며 미리는 순간 뜨끔해졌다.
‘어려 보인다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리의 얼굴에 옅은 분홍 물에 씻긴 아찔함이 내려앉았다.
“사실 자주 그쪽을 봤었어요. 가끔 비슷한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바깥을 보는 거 같았으니까요. 저는 하늘을 보는데 그쪽은 뭘 보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저를 본 것 같았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계속 보고 있었다는 말끝에 부끄러움이 조금 묻어있었다.
미리는 표면이 말라서 까슬까슬해진 카스텔라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는 것 같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 까슬해진 목소리 덕분에 미리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조우찬입니다. 취미가 별 관찰인데 요즘 별 말고 자꾸 누구를 보게 되더라고요. 들키고 말았지만요. 흰 모자만 안 썼어도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들키고 싶었나 봐요.”
미리 역시 그날 입었던 빨간 스웨터를 무심히 입고 나왔던 걸 순간 자책하고 있던 터라 우찬의 흰 모자 얘기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방금 웃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미리의 횡격막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고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우찬은 검은 가방 옆구리 주머니에서 종이팩에 든 생수를 꺼내어 뚜껑을 열고 미리에게 건네주었다. 십 분도 채 안 걸리는 시간이었다. 그 십 분의 상황들은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초 단위로 슬라이스되어 빈틈없이 정렬된 채로 미리의 기억 속에 박제되고 있었다.
우찬이 보던 시간과 미리가 느낀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간 거라면 그 모든 상황들은 뒤틀리지 않고 우찬과 미리를 초 단위의 같은 시공간 프레임 안에 품고 있을 거였다.
십일월 셋째 주 토요일 빠른 오후 햇살이 맑고 밝았다. 커다란 고기압이 북서쪽에서 온다고 했던가.
조금 서늘했다.
중국발 미세먼지들이, 차갑고 무거워져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이동해 오는 고기압 덩어리를 뚫고 동진하지 못했는지 하늘이 파랬다. 보기 드문 진한 파란색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지난겨울 끝자락에 가지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갔지만 봄엔 여지없이 가늘고 연한 새 가지들을 쑤욱 쑥 밀어 올렸었다.
새로 돋은 연한 가지들은 아주 잘잘한 은행잎만 내밀어서 여름엔 인색한 그늘로, 가을엔 셀 수 있을 만큼의 은행을 톡톡 떨어뜨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끝에 구린 내를 풍기며 소심하게 복수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 떨구고 남은 잎들도 많지 않았는데 큐티클 층이 벗겨진 색 바랜 은행잎 하나가 뒤로 돌려 쓴 우찬의 흰 모자 조임새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칼 위로 후드득 떨어져 앉았다.
우주가 생겨나는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라고 한다. 우주가 갑자기 요동쳐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 어떤 힘도 구분이 안되는 빅뱅 이전의 우주는 얼마나 완벽한 대칭성 속에 있는가? 동시에 그 완벽함으로 인해 또 얼마나 불안정한가?
그날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보았던 순간, 그 완벽하지만 불안정하던 미리의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초단위로 슬라이스 된 아주 느린 시간들이 미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우찬의 머리에 내려앉은 작고 메마른 은행잎을 떼어냈다.
우찬의 머리 위에 떨어진 은행잎을 떼어낼 때 바라본 우찬의 눈동자에서 미리는 자신의 얼굴이 되비치다 사라지고 별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우주가 폭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찬의 눈동자에서 동공은 점점 작아지고 이미 폭발해 버린 갈색 홍채는 더 밝은 빛을 내며 툭탁거리며 타오르는 듯했다. 미리는 그 밝은 갈색 빛살들이 우찬의 눈동자를 빠져나와 포대기처럼 미리와 우찬을 휘어 감는 듯했다.
광선 검처럼 짓쳐들어오던 우찬의 말에 슥슥 베이고도 남아있던 미리를 뒤덮고 있던 나머지 껍질들, 투명하지만 완강하고 두껍던 두려움과 긴장감은 켜켜이 풀어져서 둘을 감싸고 있던 밝은 갈색의 포대기 위로 빠져나가 좁은 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 야윈 가지들을 타고 파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미리의 발목까지 차올랐다가 멀어지고 다시 차올랐다가 멀어졌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들이 사라지자 껍질을 잃어버린 연체동물처럼 무너지려는 미리의 온몸을 겨우 붙들어 세운 것이 발목으로 차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차올랐던 새로운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미리는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미리와 우찬은 매일 만났다.
미리가 아주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성실하게 다니고 있는 직장일 외에는 사적인 시간에 사람들과의 만남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매일 만났다. 저녁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고 거리를 걷다 집으로 돌아가면 각자의 발코니와 창에서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리의 집에서, 때로는 우찬의 오피스텔 옥상에서 미리의 카메라로 골목길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우찬의 망원경으로 좁은 하늘을 뒤져서 몇 개 안 보이는 천체들을 올려다보기도 하였다.
우찬의 망원경 하나는 미리의 발코니로 옮겨졌고 우찬의 방에는 고사리 화분이 잔뜩 늘어났다. 우찬은 서투르게나마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의 방에는 희미하게 새끼 위성들을 줄줄이 달고 있거나 띠를 두른 모습의 행성들이나 태양의 흑점과 월면 사진들이 가득했지만 그 사이사이로 미리의 사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찬은 미리가 만들어내는 사소한 변화들을 좋아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를 원했다.
미리가 초록색과 빨간색, 파란색이 교차로 짜인 패브릭소재의 미니 소파에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폴폴 올라오는 아주 작은 반짝거리는 먼지들, 노랗게 염색된 양털이 거칠게 섞여 짜인 담요에서 터럭들이 날아오르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장난스럽게 미리를 안아서 앉히기도 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기도 하며 소동을 벌였고 끊임없이 웃기도 하고 토닥거리기도 하였다.
미리는 그때 우찬에게 빠져있었다.
우찬 역시 미리에게 깊이 빠져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었다. 우찬은 미리의 모든 것을, 미리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른 새벽 여명이 푸르스름한 냉기와 함께 스며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우찬은 여지없이 깨어 미리의 머리에서 나는 옅은 냄새를 킁킁대며 맡다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어서 조금 차가워진 미리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쓸며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미리의 팔뚝에선 작은 소름이 돋았다가 우찬의 따뜻한 손길이 닿으며 조용히 가라앉았고 대신 너무 가늘어서 도저히 털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은 솜털들이 부스스하게 일어나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새벽빛에 빛나며 가늘게 떨리는 것을 우찬은 숨죽이며 바라보곤 했다.
우찬이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따뜻한 미리의 몸을 가만히 껴안으면 차가워진 우찬의 몸 때문에 미리가 내던 가느다란 고양이울음소리 같은 작은 신음소리를 너무 좋아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백번쯤 그 소리를 내달라고 조른 적도 있었다.
일요일 아침 햇살 아래 미리의 얇은 눈꺼풀에 미세한 푸른 정맥이 되비치는 것 마저 신비하고 아름답다며 카메라를 들이밀어 찰칵 소리를 내는 바람에 늦은 잠에 혼곤히 빠져있던 미리를 깨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이불 밖으로 나온 발뒤꿈치에서 종아리를 향하여 쭉 뻗어 올라가던 아킬레스건의 예리함을 감탄하며 흥얼거렸고, 때로는 귓바퀴 뒤에 난 작은 점의 하찮음을 어루만졌고, 때로는 숨결을 따라 배꼽의 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순간을 소중해하며 엎드려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미리의 배꼽으로 가져가면서 우찬은 가끔 외치곤 했다.
“블랙홀이다. 블랙홀을 만났다. 빨려 들어가고 있어. 영원히 도망칠 수 없어.”
“미리 은하의 중심 블랙홀이야. 이제 이 경계만 넘으면 난 사라지고 말 거야. 아주 빠른 속도로 도망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어. 이제 조우찬은 사라지는 거야. 아아악! 빨려 들어간다. 빠아 알려 어... 꼬르륵.”
그렇게 외치며 우찬은 미리의 배꼽 위로, 배 위로, 넓게 퍼져 평평해진 미리의 마른 가슴 위로 쓰러져 들어오곤했다. 미리는 우찬에게 블랙홀이었다. 우찬의 몸도 마음도 미친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작지만 저항할 수 없는 블랙홀이었다.
우찬은 그 모든 시간이 아까워서 아예 집을 합치고 싶어 했지만 몇 가지 면에서 미리는 언제나 단호했다. 미리의 단호함은 주로 우찬이 미리의 가족들을 궁금해 할 때, 미리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 할 때, 또는 성급하게 결혼이나 아이들과 같은 과거나 미래지향적인 것을 슬그머니 꺼낼 때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리의 단호함은 칼 같은 차단이라기보다는 아주 완곡하지만 동시에 완강한 거부였다.
가족, 어린 시절, 결혼, 아이와 같은 단어와 따듯함, 포근함, 아련한 달콤함과 시큼함이 함께 어우러져 미리 앞에 펼쳐지다가 미리의 표정에서 뚝뚝 떨어지는 서늘함에 다 흩어지다 풀어지고 얼어붙어 미리와 우찬의 발등으로 부서져 내리곤 했다. 미리는 그렇게 발등에, 발아래 쌓인 단어들의 폐허를 조용히 밟으며 우찬으로부터 발걸음을 떼어 한두 걸음 이상 멀어지기 일쑤였다.
우찬은 서운한 표정을 못내 감추지 못하며 미리에게 숨겨진 정보요원이 아니냐고 놀리는 걸로 어색해진 상황을 종료했다. 손만 스쳐도 부서질 것 같은 미리에겐 어울리지 않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차라리 그게 진짜면 좋겠다는 뭔가 모를 바람이 우찬의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미리가 파리해진 얼굴로 밟고 지나가며 부서진 그 단어들의 파편은 우찬과 미리의 가슴 속에서 똑같이 서걱서걱 얼어서 쌓였다가 녹았고 또다시 쌓였다가 녹는 일이 차츰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