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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호흡

미리의 시간 epi. 4(우찬의 시간)

by 우유강

우찬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겸 연구원 인턴을 앞두고 있었다.

우찬이 처음부터 박사과정까지 염두에 두고 석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에 박사과정으로 진로를 결정하자 틈만 나면 교수들 흉보기에 열을 올렸던 동기들 중 하나가 ‘우웩~’하며 토를 하는 시늉을 했었다.

과정 내내 전담교수가 따오는 프로젝트들 때문에 숨 쉴 틈 없이 몰아쳐 왔기에 이걸 계속하느니 그냥 어지간한 공사에 입사해서 워라밸이나 즐기겠다는 동기들이 더 많았다. 아주 단단하게 목표를 정한 것이 아니라면 다들 뜯어말리는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 한 학기 정도 잠깐 숨이나 쉬자며 놀고 있던 동안 우찬은 전공 지도 교수의 끈질긴 도움 요청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그저 머리를 비우는 데 집중했다.


캐나다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다가 돌아와 시작한 것은 학부시절 천문관측 동아리 활동에 슬금슬금 끼어들기였다. 아니면 혼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별이나 보며 멍 때리는 게 최선의 휴식이었다.

우찬은 일 년 전부터 막내 삼촌이 건축한 8층짜리 꼬마빌딩 꼭대기 층 오피스텔에 묵으며 관리실에 접수된 이런저런 내용들을 검토해서 삼촌이나 시설 관련 업자들에게 연결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서 하고 있었다. 신축이라 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무료로 오피스텔을 사용하게 된 우찬의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는 삼촌의 배려라는 걸 우찬은 알고 있었다.


우찬은 침실 창 쪽에 무거운 철제 책상을 구해 놓고 그 위에 250mm 돕소니안 반사 망원경을 두었었다. 별을 보는 용도가 아니라 그저 망원경을 보는 것으로 위로를 삼던 우찬은 그걸 알루미늄 컨테이너에 곱게 담아버렸다. 이제 그건 우찬과 함께 산으로 바닷가로 함께 돌아다닐 동반자 역할을 할 거였다. 대신 부랴부랴 굴절망원경을 하나 사서 루프 탑에서 혹은 거실 창가에서 흐린 하늘을 뒤지며 뭐라도 들여다보기 시작했었다.

굴절망원경은 구경이 작아서 가대를 쓰더라도 다루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일이층 정도 수시로 들고 오르락내리락하기 편했고 중국산 저가 제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구하는 게 일도 아니었다. 새벽배송으로 배달 안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다섯 학기 째 한 학기 내내 논문과 씨름하느라 욕지기가 나올 만큼 지쳤던지라 캐나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어도 소진되어 버린 것 같았던 영혼 한 귀퉁이를 다시 찾아와 불씨를 살려야 할 때였다. 더 퍽퍽한 시간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면역력이 필요한 법이므로.


인구가 천만 명에 육박하는 도시의 하늘은 별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사실상 SF 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뚜껑 덮인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큰 도시는 열 돔을 덮어쓰고 있기 마련이다. 열 돔은 계절과 무관하게 견고하게 도시를 뒤덮고 있어서 도시의 열기와 먼지는 웬만해서는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여름엔 시원하기 어렵고 겨울에도 시베리아 고기압이 사나운 이빨로 열 돔을 할퀴고 찢어 들어와 도시를 꽁꽁 얼리기 전에는 늘 어른거리는 열기가 하늘로 향하는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도심의 밤하늘은 열 돔 밖의 별을 죄다 돔 안의 지상으로 쏟아버린 것인지 하늘에 남은 천체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우찬은 그래도 멀리 보이는 저녁달을 서쪽 하늘에서 동쪽 하늘로 훑어가며 쫓아다녔고, 달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다니는 행성들을 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때로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저물어가는 달을 잡으려 망원경을 들이댄 적도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잡힌 피사체가 미리였다.

아파트는 거대한 성체처럼 시야를 막고 있었는데 칸칸이 구획 지어진 창들의 오와 열은 사실 길가의 가로수보다 더 특별하지 않은 매력 없는 대상이어서 한 번도 망원렌즈에 포착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한 곳 발코니 버티컬 좁은 틈 사이로 삼각대에 올려진 카메라가 보였고 카메라 뒤로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번 째 보았을 때 짧은 머리의 여자라는 걸 긴 치마를 보고 알게 되었다. 두 번째부턴 우찬이 부러 찾아봤던 게 사실이었다.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장착했지만 그게 상향각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하향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린놈이 무슨 속셈으로, 도대체 뭘 훔쳐보나 싶은 불편한 마음이었고 저걸 찾아내서 혼내줘야 하나 어쩌나하는 갈등이 이는 마음도 있었다.

부모들은 알고나 있는 건가? 하는 약간의 힐난 섞인 마음으로 봤었던 거였다. 그러다 틀림없이 여자라는 생각이 든 후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찾아보게 되었다. 때로는 평일 낮에도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아파트에선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의 동태는 없었다.

‘저 여자 뭐지? 뭘 보는 거지?’

나쁜 습관을 가진 여자로 캐릭터 설정을 하자 사실 우찬은 조금 흥분되기도 하였다.

우찬은 처음 미리를 본 후로 한 달 가까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망원경을 달이나 행성들 대신 그녀가 있는 아파트 쪽에 고정시켰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을 발견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왔었다. 긴 그림자를 물고 해가 그녀의 아파트 뒤로 넘어가는 때였다. 우찬이 사는 빌딩은 외벽의 색깔이 밝아서 노을이 닿으면 주위의 그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나는 건물이었다.

우찬은 그날도 약간 들뜬 마음으로 무심코 여름 한 달 캐나다를 누비며 쓰고 다니다 구석에 던져 놓았던 흰 캡을 뒤집어쓰고 망원경으로 초점을 맞춰보고 있었다. 그리고 초점이 맞춰져 선명해진 시야로 그녀를 보았다.

'아. 보이네. 보이네.'

우찬의 심장이 갑자기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그녀가 카메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자신인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쩌릿함이 뒷골을 타고 척추 끝 꼬리뼈까지 흘러 내려가는 것 같았다. 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망원경을 놓고 일어났지만 시선은 그녀가 있을 그곳에 못 박힌 것 같았다.

‘들켰나?’

그동안 그녀를 훔쳐보았던 것은 들켜서는 안 되는 '짓거리'임에 틀림없었기에 우찬은 얼굴도 마음도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우찬은 한 오라기 희망을 갖고 들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망원경 아이피스에 오른쪽 눈을 갖다 대었다. 그녀의 발코니에 남아있던 좁은 틈이 어느새 어두운 버티컬로 꽁꽁 닫혀있었다.

‘들켰네.’

그녀 역시 우찬처럼 당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찬은 그 이후로 서로가 서로에게 들키기를 바라며 더 자주 그녀의 아파트를 바라보았지만 버티컬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진한 갈색이거나 군청색인 것 같은 발코니의 버티컬이 열리기는커녕 밤에도 거실의 불빛이 환하지 않았다. 흐리고 노란 조명이 조금 흘러나와서 여전히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무엇엔가 집중하고 빠지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면 그는 아주 신중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시간에 실체가 있다면 어쩌면 두 개체 혹은 그 이상의 개체들 사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속도의 한 팩터일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에 따르면 우찬은 그런 면에서 언제나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찬의 삶에서 미리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그런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신중하다'는 표현은 다르게 정의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충고 따위는 힘을 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신성아파트 101동 1003호의 발코니에 있던 삼각대 위의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와 그 너머의 짧은 머리를 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와 우찬의 공간은 실제 직선거리로는 삼백에서 사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기까지 그 물리적인 거리는 공고했었다. 우찬이 완만한 속도로 상상해 왔던, 짧은 머리의 불순할 게 틀림없는 취미를 가진 그녀와의 조우는 갑작스러운 충돌로 인해 상상불가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었다.

공연히 흰 모자를 뒤집어쓴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찬과 그녀가 망원렌즈를 통해 서로를 동시에 알아봤다는 것은 거의 교통사고와 같은 충돌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아무것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 그 발코니로 인해 우찬과 그녀 사이의 물리적 속도는 제로였다.

제로 말고 또 어떤 값을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우찬의 심리적 거리는 이미 우찬의 마음 안에서 마음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찬은 이미 그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우찬은 미해결의 값을 지닌 시간 안에서 한 달 내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모른 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찬은 조금은 민망해하며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뇨. 전 그녀를 알고 있어요.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랬다.

우찬은 이 주가 넘게 그녀의 발코니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살고 있던 신성아파트 101동 주변을 맴돈 적이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비탈길에 지어진 101동은 두 개 지층에 상가들이 있어서 주민들이 우스개로 칭하길 주상복합 형태였다. 우찬은 상가 앞 도로를 따라 101동을 한 바퀴쯤 돌고는 생수를 사서 두 바퀴 째 돌다 거주민용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출입구 쪽에 있는 우편함 뚜껑을 젖히고 손을 넣어 더듬으며 우편물을 하나 찾아내 들고 나오는 여자를 보았다. 머리가 짧고 마른 여자였다.

아파트 첫번째 라인의 출입구 양쪽으로는 피아노 학원과 어린이집이 있었고 우찬은 얼른 어린이집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세 평 남짓의 텃밭과 꽃밭 사이로 난 어린이집 출입로로 자연스럽게 들어서던 우찬의 머릿속은 하얗고 가는 손이 드나든 우편함 번호가 분명히 1003호라는 걸 되짚고 있었다.

그녀는 우찬의 생각보다 키가 조금 더 커 보이고 훨씬 더 말라 보였다. 처음 볼 때 중학교 남학생쯤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어린이집 앞을 지나가는 창백하고 무표정한 그녀에게서 한 줄기 향이 실오라기 나풀거리듯 나부끼다 우찬의 코끝을 휘감고 지나갔다. 곱슬기가 살짝 있는 짧은 뒷머리는 사방으로 삐죽 대고 있었다.

옅은 카키색 카고 바지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데님을 겉옷으로 입고 플랫슈즈를 신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우찬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옆 동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도 우찬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 한 분이 어린이집으로 손녀를 데리러 오신 건지 우찬이 있던 텃밭과 꽃밭 사이에 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찬을 둘러싼 시공간은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향해 붕괴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찬에게 작용하는 중력의 중심은 명백하게 바로 그녀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서려는 그녀를 막 보고 뒤따라 들어가던 날. 우찬은 인정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게 된다.


그녀는 흰 캡을 뒤집어쓰고 적당한 길이의 검은 망원경 가방을 메고 뒤 따라 들어간 우찬을 보고 당황하며 부동산 사무실을 황급하게 빠져나갔다. 오피스텔 호실 하나가 나갈 때가 되어 들른 것이기도 했지만 카메라가방을 멘 짧은 머리의 그녀가 눈 앞에 있는데 어떻게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가 계약기간도 채 안 끝난 집을 임대매물로 내놓으러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뒤따라 나갔던 것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길 위에 서서 맴돌고 있던 그녀에게 서둘러 곧바로 다가가 에두르지 않고 아는 척했던 것은.

달이 지구 주위를, 지구가 태양 주위를, 태양이 자신이 속한 은하의 나선 팔에서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휘감으며 돌고 있는 것은 자신들을 집어삼키듯 끌어당기는 중력에 의한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또 너무 빠르게 돌다가는 튕겨져서 영영 멀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는 최적의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 그런 움직임처럼.

그건 순전히 우찬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무엇보다 많이 당황한 것 같은 그녀를 안정시켜줘야 한다는 급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초가을 햇살이 은행잎들과 함께 그녀의 어깨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찬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녀를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우찬이 흰 모자 때문에 들켰다고 해서였는지 아니면 들키고 싶었나 보다고 스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했을 때였는지 문득 슬쩍 웃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로 딸꾹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찬은 메고 나온 망원경가방에서 팩에 담긴 생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넸다. 생수를 받아 드는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고 있었다.

은행잎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그중 한 개가 모자 조이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칼 위로 떨어졌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다가왔다.

아니 그녀의 팔이, 그녀의 손이 다가와 머리칼 위에 놓인 은행잎을 떼어냈다.

우찬은 또다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이상한 안도감이 온 몸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딸꾹질이 멈추진 않았지만 얼굴엔 담홍색 단풍잎을 빠져나온 햇살이 번져있었다. 우찬은 부동산중개사무소 옆에 자리 잡은 카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따뜻한 걸 좀 마시게요. 잠깐 좀 앉아야할 것 같기도 하고요.”

우찬은 그녀의 어깨에 걸린 카메라 가방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주세요. 무거워 보여요.”

그녀가 잠시 움찔했지만 순순하게 카메라 가방을 벗어 우찬에게 넘겨주었다.

우찬은 그녀의 카메라 가방을 넘겨받아 자신의 망원경 가방을 멘 오른쪽 어깨에 겹쳐 메었다.

왼쪽 팔을 비워놔야 혹시 그녀가 비틀거리거나 계단을 올라갈 때 붙잡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가 묵직해졌지만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우찬의 온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미리를 만났던 시간들은 온통 채휘의 계절이었다. 가을이 아니었어도 가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붉은 계절이었을 것이다.

우찬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을은 조금 달랐다.

여전한 초록 속에 가끔 노란 은행나무가 조금 보였고 우찬이 어린 시절 살았던 남쪽 바다 넘어 섬엔 가로수조차 겨울 내내 초록빛 잎에 빨간 열매들이 아른아른 달리는 먼나무나 녹나무, 심지어 야자수들이었다.

북쪽 도시로 나가야 짧은 봄의 화사한 벚꽃을 피우던 가로수에서 가을의 낙엽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오름을 뒤덮은 억새물결 말고는 여름과 많이 다르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저 조금 색 바랜 여름이었다. 해발 오백 미터가 넘는 산의 중턱에 가면 비로소 강렬하고 맑은 채도의 단풍들을 아주 귀했다.

중산간 아래로부터 해안으로는 빙 둘러 눈 씻고 찾아봐야 새잎부터 적갈색으로 올라오는 일본단풍 말고는 초록으로 싹이 올라와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드는 단풍이 드물었다. 겨울조차, 무겁게 내리누르는 하얀 눈 더미 밑에 언제나 초록한 풀들이 기죽지 않고 있었고 하루 이틀만 버티면 아무리 두껍게 내렸던 눈도 바로 녹아서 곧바로 뻣뻣이 살아나는 초록세상이었다. 사계절이 초록한 곳에서 가을은 봄보다 훨씬 짧았고 갈색 낙엽의 시간은 금방 사라졌었다. 미리를 만나기 전까지 우찬에게 가을은 늘 클릭만 하면 휘리릭 넘어가는 모바일 광고 같은 그런 계절이었다.


우찬은 색보다는 빛에 매료되는 편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을 교정을 수놓은 노랑과 빨강 그 사이에 열 단계쯤 그러데이션 되는 다채로운 주황과 주홍에 놀랐었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주황과 주홍의 숲에서 비로소 가을이라는 색의 계절을 체감했을 때도 감동보다는 ‘오!’ 하는 감탄 정도였다.

그보다는 늘 미세먼지 속에 희미하게 떠있는 빌딩들의 윤곽 뒤로 비치는 세기말적 햇빛의 빛 내림에 더 매료되었다. 또, 밤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빛들이나 반딧불이들, 호수나 강물의 윤슬 같은 빛나는 아주 작은 움직임들에 빠져드는 편이었다.

그런데 미리가 공인중개사 사무실 앞에서 딸꾹질을 하다 우찬의 머리에서 은행잎을 떼어낸 그 순간 우찬에게 세상의 모든 빛 보다 더 다채로운 색의 세상이 열렸다. 하늘은 파랬고 하얗고 깃털 같은 구름들이 꼬리를 뿌려 올리며 느리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수들은 노랬고 한 블록 뒤에 높이 솟은 대학의 높은 담장 위로 아주 붉고 노란 단풍들이 꽃 더미처럼 우찬과 미리가 있는 공간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맑고 환한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조금 파리한 미리의 얼굴에 작은 점 몇 개가 콧등과 광대 사이를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귀여웠다.

미리는 중간 길이의 다양한 문양이 섞인 면 퀼팅 카디건 속에 브이넥의 빨간 스웨터를 입었다. 생각보다 훨씬 얇은 빨간 스웨터는 그녀의 피부색마저 투명하게 느껴지게 했다. 흑갈색의 짧은 미리의 머리는 햇살과, 은행잎을 자꾸만 떨어뜨리는 바람에 의해 밝은 갈색처럼 나풀거렸다. 억새들이 햇빛과 바람을 받으며 밝게 나풀거리는 것 같았다.

보도블록의 밝은 회색과 상가입구에 설치된 좁지만 긴 데크는 오일 스텐을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진하고 촉촉한 갈색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배색이었는지 새삼스러웠었다. 카페에는 샛노란 어닝이 데크 절반까지만 내려와 있었다.

‘가을이 이런 색과 빛이구나.’

우찬의 이전 가을은 적록색맹이 보는 세상 같았다면 그 순간부터는 색각 보정 안경을 처음 쓰고 바라보는 가을 같았다.

우찬은 마치 미리와 연애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비워놨던 사람처럼 온전히 미리에게 몰두했다. 미리가 교대근무를 하러 나갈 때조차도 우찬은 미리의 집에 있고 싶어 했다. 마치 미리를 위해 모든 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고자 했고 미리가 기꺼이 그 열린 문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우찬은 이미 미리의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미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딸꾹질을 하던 미리를 살짝 부축하고 노란 어닝이 있던 카페에 들어갔다. 따듯한 얼 그레이 티를 같이 마시고 테두리가 일그러진 그녀의 카메라 망원렌즈를 살펴보며 망원경을 추천하였다.

그 후 둘은 자주 만났고 그녀와 함께 작은 천문관측 돔을 갖춘 망원경 전문점을 같이 다녀왔던 날, 미리의 몸이 뜨겁게 열렸다.

미리의 피부는 서늘했지만 몸 안의 작은 동굴들은 뜨거웠고, 몸짓은 소극적이었지만 그녀의 모든 피부는 우찬의 모든 피부와 젤리처럼 달라붙을 수 있었다. 어설프기만 하던 우찬의 이전 경험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리의 몸 안에서 완벽한 하나를 느낄 수 있을 때 우찬은 온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다 살아나 외치는 거 같았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지만 우찬의 사랑이 미리를 향해 점점 더 깊어지는 것과 달리 미리는 여전히 ‘바로 지금’ 이외의 미리의 시간 속으로 우찬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리의 시간을 우찬이 서둘러 상상하려는 것 역시 싫어했다. 싫어하는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애매했지만 그런 말을 꺼내기만 하면 미리는 어느새 멈추고 또 조금 멀어져서 우찬을 당황하게 하곤 했다.

꾹 닫혀있었던 미리의 지나간 시간들의 문을 열 재간이 없었지만 우찬은 아쉽지 않았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때문에 미리에게 속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그때 미리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우찬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


그 해 가을은 기분 좋은 따듯함과 서늘함이 차례로 찾아왔고 나무들은 단풍을 서둘러 내려놓지 않았다. 아주 오래 서서히 붉고 노란 단풍들을 어떨 땐 촉촉하고 반짝거린 채로, 시간이 좀 지나서는 갈색으로 바삭하게 말려 적당할 때 떨어뜨렸다.

적당할 때라는 건 말하자면 짧은 가을, 맑은 주말에 미리와 우찬이 얇은 트렌치 코트 자락을 날리며 팔짱을 끼고 걸어갈 때 그 둘의 앞뒤로 우수수 떨어뜨리는 걸 말한다. 또는 퇴근하는 미리가 타고 올 버스를 기다리던 우찬이 니트 비니를 무심코 벗을 때 그 머리 위로 낙엽 하나쯤 떨구어 줘서 미리로 하여금 우찬의 머리에 앉은 낙엽을 집어내며 놀릴 수 있도록 때를 맞춰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으로 가을은 짧지만 그 해 가을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겨울은 눈 깜빡할 사이에 찾아온다.


미리에게 할머니의 부고가 전해졌다. 미리에게 할머니의 부고가 날아오자 우찬은 한편으로는 안심하였다.

‘가족이 있는 게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우찬은 잠깐 스스로 민망해졌다.


‘천천히 오라게. 예리가 연락이 안 되는데 너도 한번 알아보고 마시.’

수화기 너머로 애매한 나이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예리가 연락이 안 돼요? 할머니 전화 1번에 예리 번호 있을 텐데요.”

미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리에게 먼저 연락 핸. 경핸 아직 연락이 안 돼 마시. 외국 나간 건 아닌지 모를켜'

“제가 다른 연락 방법 찾아볼게요. 짐 챙기고 비행기 표 되는 대로 바로 내려가도록 할게요. 큰아버지들은 혹시 연락되셨어요?"

'전화해서 고뢌다게. 그추룩 싫어해도 어멍이 돌아가셨신디 당연히 바로 온다해씬디 날씨가 걱정이라.4일장 할 거 작정하고 이서부난 걱정 말고 너나 잘 챙겨 오라.'

"네. 삼촌."

미리의 전화기 너머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웅웅거렸지만 고달프게 들려왔다. 전화를 끊은 미리는 한동안 맥을 놓고 앉아 있었다. 미리는 울지 않았다. 미리가 울지 않아도 될 만큼 멀리 살았나 보다고 우찬은 지레짐작했다.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 곳인가?'

미리의 대답 소리만 듣던 우찬은 미리의 할머니가 사는 곳이 가까운 일본이나 다른 외국인가 싶어 물어봤다.


“할머니 집이 어디야? 이제 말 좀 해주지. 시크릿에이젠트?”

우찬은 조금은 안달하며 물었다.

“제주”


동그란 우찬의 눈이 확 커졌다. 우찬은 갑자기 기가 탁 막혔다.

“제주? 제주 어디?”

우찬의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미리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북촌.”

우찬은 잠시 머리기 띵해졌다.

“북촌?”

우찬의 목소리가 커졌다. ‘촌’을 발음할 때 우찬은 자신도 모르게 어렸을 때 사용했던 고향 말투로 억양이 구부러져 올라가는 걸 느꼈다.


우찬의 목소리에서 그동안 눌러왔던 궁금증 하나가 풀리면서 갑자기 화가 묻어 올라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미리에 대한 궁금함을 풀 수 없는 동안 사실은 속상함이 효소가 되어 켜켜이 쌓이며 발효되고 있었다는 걸 우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우리 집 성산이라고 얘기할 때 왜 아무 말 없었어? 우리 둘 다 제주도 사람이었던 거네. 그것도 둘 다 동쪽이네.”

우찬은 자신이 가족들 얘기를 할 때 한 번도 미리가 눈을 마주 보고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와아. 쫌. 누나!”

우찬의 입에서 갑자기 누나라는 호칭이 터져 나왔다. 거의 비명소리처럼 내지르는 누나 소리에 미리가 움찔하였다. 미리는 이모할머니네 작은 삼촌으로부터 날아온 할머니의 부고에 다리 힘이 풀려 소파에 기대어 쪼그려 앉은 참이었다.

우찬은 미리보다 일곱 살 어렸다.

우찬은 미리에게 카메라 망원렌즈를 고비용으로 수리하기보다 저가의 망원경을 새로 구입하는 게 어떤지 권유했었다. 겸사겸사 구경삼아 들렀던 불광동 주택가의 망원경 전문샵에서 회원 가입할 때 누르던 그녀의 생년월일을 의도치 않게 보게 되었다. 나이를 알았다고 해도 우찬에게 미리는 연상녀, 누나가 아니었다. 그냥 돌봐주고 싶은, 뭔가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여리고 여린 사람 그 자체였다.

미리의 집엔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이 별로 없었다. 흔한 인형이나 키링 같은 것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냉장고에 뭔가가 잔뜩 붙어 있어서 가족이나 친구들 사진이라도 있나 했지만 그저 여행지를 기념하는 자석들뿐이었다. 거의 미국 중서부를 위아래로 종단한 것 같은 자석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미리의 집은 좀 썰렁하다 싶었는데 아기자기한 데코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두 장 정도 있을 법한 가족사진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 썰렁함을 대신해서 웜톤의 30호 정도 크기의 풍경화가 거실과 안방에 걸려 있었다. 비슷한 색조의 풍경화들은 산과 강과 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구도에 밝은 가을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째 시골 이발소 풍경화 같다고 했더니 미리가 잔뜩 째려본 적이 있었다. 미리는 화가의 화풍이 마음에 들어 덴버 부근의 미술관에서 복제품을 사 왔다고 했다.

화가인 앨버트 비어슈타트의 풍경화 속에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너무 작아서 보기에 편하다고 하였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그림 속, 사람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리에서 그려진 그림이라서 좋았고 마치 기독교의 성화처럼 햇빛이 특정 지역을 비추는데 그게 사람들을 향한 게 아니라서 좋다고 하였다.

미리는 정말 독특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마음이 많이 고달프고 아픈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우찬은 생각했었다.

사적으로 만나는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조차 없어 보였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거나 혹은 일종의 자폐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우찬은 근심 어린 고민을 해본 적도 있었다. 어쩌면 한두 달 만난다고, 서로 깊이 몸을 섞고 동거하다시피 붙어 지낸다고 해서 금방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우찬은 미리의 마음을 향해 한두 걸음 다가갔다가 다시 한두 걸음 물러나곤 했었다.

우찬이 미리에게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들여다보는 게 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서로의 몸을 열고 들어가 만 하루를 보채며 지내느라 느른한 오후잠에서 일어난 시간이었다. 미리의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던 우찬이 물었었다. 미리는 그때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보통 뭘 보고 있어?”

“사람.”

“사람? 사람의 무얼 보는 데?”

“그냥 사람. 움직이는 사람. 차도 좋아해. 운전 중인 차도 좋아하고 주정차 중인 차도 보기 좋아.”

“차를 좋아해?”

“아니야 차를 좋아하기보다는 차 안에 사람이 있을 거니까. 어디론가 갈 거니까. 혹시 사거리 근처라면 차선을 변경할지 안 할지 알 수 없으니까. 멀리 있으니 차선이 확실히 보이지 않아서 직진할지 좌회전할지, 혹은 우회전할 지도 알 수 없으니까.”

“애기네. 애기. 호기심 대마왕 애기”

우찬이 약간 장난스레 얘기하자 미리가 쿠션을 집어 들어 우찬의 얼굴을 살짝 눌렀다. 우찬은 푹신한 쿠션에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미리에게 고양이처럼 하악거렸다. 미리가 이제 꼬리가 아예 없는 고양이가 한 마리 생겼다고 놀리며 웃다가 차분하고 느리게 대답했다.

“궁금함이 꼭 풀어야 할 숙제처럼 무거운 것이 아니라서, 금방 사라질 궁금함이라서 편해.”

우찬은 미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놓았었다.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응. 좋아하니까 그렇게 귀한 시간을 내서 공들여서 바라보겠지. 당신이 나뭇잎이나 구름을 보는 게 아니었어.”

"아니. 나뭇잎이나 구름은 언제나 봐. 눈으로."

"눈으로 보고. 스쳐서 봐. 나뭇잎이나 구름의 움직임은 얼핏 봐도 대개는 예측이 가능해.”

“바람의 방향에 맞춰서 흔들리거나 흘러가. 그런데 사람의 움직임은 예측이 불가해.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서 더 알 수가 없어.”

“그래도 반복해서 보다보면 대충 예측이 가능하지 않아? 예를 들어 대학교 담장 밑에 주정차하는 자동차들 중에는 정기적으로 주정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특정한 차의 경우 차주가 나와서 늘 특정한 방향으로 간다면 예측이 가능해지잖아.”

미리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두세 번 이상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는 차나 사람들은 다시는 안 봐.”

“응? 와이 낫?”

“그렇게 되면 관계가 형성되는 거 같아서 싫어. 내가 관찰하는 행위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내 바람이고. 그래서 내게 관찰되는 사람들도 나에게 어떤 영향도 안 미쳤으면 좋겠으니까."

미리는 말끝을 흐렸다.

미리에게서 그때 탄력 있는 유리솜으로 된 벽에 안기는 듯 부딪혀 튕겨지는 반발력이 느껴졌다. 미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다고 우찬은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그 후 무리 없이 적중했다. 우찬은 속으로 힘껏 심호흡을 했다.

“아잌후~~ 난 당신 기준에서 보면 정말 열외인 셈이네.”

우찬이 미리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살짝 입바람으로 불어올리며 이어 말했다.

“당신은 이미 나에게 어찌할 수 없는 영향력을 아주 강력하게 주고 있는데? 어떻게 하지? 모르긴 해도 나도 이미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맞지?”

놀리는 듯, 감동한 듯 우찬은 살뜰하게 미리를 살펴가며 말을 이어갔다.

미리는 잠시 얼굴을 이불 속으로 감추더니 몸을 구겨 둥글게 말았고 조금 있다가 쿨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냈다.


우찬은 당황하였다. 미리가 울고 있었다.

우찬은 이불을 들쳐 미리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이불로 미리를 포근하게 감싸서 안고는 등을 다독거렸다.

미리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모험이고 도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찬은 전에 무심코 자신이 알아도 되는 미리와 연관된 살아있는 객체는 고양이 한 마리뿐이냐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의 눈물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솟아나 마음이 찡하였다.

미리에게는 ‘니모’라는 이름의 낯을 심하게 가리는 꼬리 짧은 고양이가 한 마리가 있었다. 흔들 수 없는 꼬리를 가진 니모는 우찬이 미리의 집에 들어가면 절대로 소파 뒤에서 나오지 않아서 우찬의 애를 태우곤했다. 니모는 밥테일 종의 고양이가 아니라 꼬리가 덜렁거리는 상태로 구조된 어린 유기묘였다고 했다.

우찬은 그때 미리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 누운 채로 미리의 왼쪽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말했었다.

“이렇게 연약한 손목에 이렇게 차분한 심장박동인데 왜 내겐 당신이 엄청 강력한 파워를 지닌 여전사같이 느껴질까?”

미리는 그때 우찬의 눈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우찬의 눈썹을 결에 맞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두려운 뭔가가 있는 건 아니고?”

“겁이 좀 나는 건 사실이지.”

“왜. 무서워서?”

“아니네요. 당신이 너무 굳건한 여전사 같은데 사실 대부분은 손가락만 툭하고 대도 바사삭 부서질 거 같아서 그래서 겁이 난다고.”

미리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모르던 찬이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돌파하기도 어려워 보이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온 거 같아.”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우찬의 말에 미리의 눈이 슬퍼보였다. 그 때 미리는 그저 허리를 굽혀 우찬의 이마에, 눈썹에, 그리고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차례로 그리고 가만히 얹었다. 우찬은 미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우찬의 뺨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가락도 같이 떨리는 걸 느꼈다.

우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되든 아주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걸 그때 알았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미리에게 어떤 요구도 강요하지 않겠다고. 그랬던 우찬이 미리에게 같이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할머니 장례식장 같이 가자.”

“당신 혼자 못 보낼 거 같아.”

쪼그려 앉아있던 미리가 고개를 들고 여행 가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우찬을 바라보았다. 미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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