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시간 epi. 6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러졌다. 상주인 미리의 큰아버지들이 모두 나흘째가 돼서야 첫 비행기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리가 우찬과 함께 제주에 도착한 밤부터 이틀 내내 눈 폭풍이 쏟아졌다. 기상관측이 시작되고 전례 없는 적설량이라고 하였다. 공항과 항구도 눈과 바람 때문에 올 스톱이 되어 제주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육지의 그 어느 먼 곳보다 빠르게 서울을 오갈 수 있던 제주가 비로소 섬이 되었다.
이틀 내내 공항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하늘과 항공사와 공항을 원망하는 소리가 눈보라보다 더 요란했다.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 한 가족들에게 제일 먼저 가까운 호텔들이 빈 방을 내줬다. 어차피 그 이틀간은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예약이 취소된 참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불가능한 사람들은 공항이 제공한 돗자리를 깔고 밤을 새웠고, 공항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며, 공항 화장실에서 씻어야 했다. 눈이 내리자마자 녹기를 바랐던 우찬의 바람은 이틀 내내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우찬은 미리를 장례식장에 내려줬지만 바로 숙소로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하였다. 단층인 장례식장엔 네 개의 빈소 중 두 개의 빈소만 열려 있었다. 우찬은 지나가는 조문객처럼 미리 할머니의 빈소 앞을 공연히 왔다 갔다 했지만 빈소에도 접객소에도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자치단체장이 보낸 조화와 동창회들에서 보낸 조화들이 두세 개 있을 뿐이었다. 조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늦은 시간인데도 상주와 가족들만으로도 북적거리는 다른 빈소와 확연히 대조될 정도로 적막하기만 해 보였다.
건물 중앙에 있는 로비에는 김안례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사진도 없이 89세의 나이에 상주로 두 아들과 두 며느리, 일곱 명의 손주 손녀들 이름을 거느리고 자신의 부고를 알리고 있었다.
손주들 이름 중에 우찬에게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현미리. 그 이름 옆에 현예리가 있어서 미리가 그녀의 삼촌과 통화할 때 얘기했던 동생이름인가 싶었지만 나머지 손주들과 두 아들의 성씨는 강 씨였다.
미리가 말하기로는 친할머니라고 했었다.
빈소에는 상주들이 쉴 수 있는 방이 있겠지만 미리가 제대로 쉬지 못할게 뻔해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우찬의 폰으로 문자가 왔다.
‘오늘 밤에는 이모할머니 댁에 들어가서 쉬기로 했어. 찬이도 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 고생했어.’
미리에게서 짧은 문자가 하나 더 왔다.
‘고마워.’
미리가 우찬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문자를 보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우찬이 아는 그녀는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늘 서툴렀다.
‘그래 다행이네. 난 내일 집으로 갈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도록 해. 내일 전화할게.’
우찬은 자판을 꾹꾹 눌러가며 답장을 보냈다.
장례식장에서 우찬이 묵을 해변 호텔까지는 차로 오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강이나 내가 지표로 흐르지 않는 제주에서는 마실 물이 귀해 대부분 용천수가 샘솟는 해변에 살아야 했다.
한라산 올라가는 완만한 기슭 여기저기에 귀하게 자리 잡은 중산간 마을들은 큰 샘물이 나오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중산간 푼 아니라 해변에도 샘물의 개수와 품어져 나오는 샘물의 양이 곧 마을의 크기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지하로 흐르다 갑자기 지표로 용출되는 용천수는 대부분 해안가에 몰려있다.
그러다 보니 해변에서 한라산 정상을 향하는 직선거리로 차로 오 분정도 걸리는 거리 내에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 모든 시설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다.
장례식장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우찬은 문득 제주의 읍단위 시골처럼, 서울같이 거대한 도시에도 장례식장들은 도심 한가운데 여기저기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오자 바다를 바라보는 창으로 호텔 방이 고스란히 되비쳤다. 방 한가운데 목욕가운을 걸친 채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역시 되비치는 걸 보고 우찬은 방 불을 껐다. 해변을 향해 오픈한 가게들이 대부분 간판 등만 켜 놓은 채 문을 닫은 건지 창 밖이 어두워 보였다. 날씨 좋은 날 밤 호텔 밖의 이시간은 불야성이었다.
우찬은 유리창 안쪽으로 뿌옇게 올라붙은 미세한 물방울들을 목욕가운 소매로 닦아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해변을 밝히는 가로등들이 눈보라 속에서 안개등처럼 부옇게 흐려지고 해안으로 몰아쳐 들어오는 파도가 눈보라보다 더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미리와 함께 갑자기 제주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같이 있는 동안 미리의 삼촌으로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전히 미리는 우찬에게 말도 없이 제주를 다녀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같이 있는 동안 전화를 받았고 미리가 우찬과 동향인이라는 걸 알았고 미리와 함께 부랴부랴 제주로 와서 집에는 연락도 안하고 호텔에서 홀로 밤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 우찬에게 기이한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
그보다 더 확실하게 지금의 자신을 대변할 질문이 있을까 싶었다.
흐르는 물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중력 값이 불균등하게 작용하는 지표에서는 물이 고일 수가 없다.
물 분자들은 서로 어깨에 어깨를 걸고 중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으로 나아간다. 고도가 낮은 곳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게 흐르고 움직여서 서로 어깨를 건 물 분자들의 어깨와 어깨가 모두 같은 높이가 되는 곳에 다다라야 비로소 흘러내리는 것을 멈춘다.
비로소 고인다.
바람이나 조석의 힘이 건들지만 않으면 바다도 호수처럼 그렇게 고요히 머물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물들이 곧바르게 흐르지는 않는다. 때로는 지형에, 때로는 지물에 부딪혀 잠시 멈추고 때로는 맴돌고, 어지럽게 휘돌다가 엉뚱하게 거꾸로 흐르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모든 흐름은 다 가야 할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이었다. 예측이 가능한 곳으로.
우찬은 그날 그 시간, 자신의 모습이 그 흐름 어디에 잠시 자리한 것이지 알 수 없다 여겼다. 좌표를 찍어 바로 이곳 혹은 저곳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미리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밀고 온, 자신의 어깨를 밀고 밀리며 오게 한 힘이 또 언젠가 현재가 될 미래까지 자신을 데리고 갈 거라는 걸, 자신이 그 힘의 흐름 속에서 나아갈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따듯한 물로 막 샤워를 마친 자신의 체온이 차갑지만 부드러운 침대의 온도를 슬슬 올리는 것을 느끼며 우찬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