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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처럼 일어나는 기억과 마주하기

미리의 시간 epi. 7

by 우유강

할머니의 빈소는 영천이 삼촌이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새워 지키기로 하였다. 피붙이가 하나라도 남아있어야 한다고 이모할머니네 막내 삼촌 영천자처한 것이다. 대신 영천이 삼촌의 친구가 미리와 이모할머니를 김녕리 해안에 있는 이모할머니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어둠이 점점 눈보라를 삼키고 있었다. 드문드문 가로등이나 상가의 불빛 아래서만 눈발이 하얗게 나부끼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어둠과 가로등 조명을 차례차례 자신의 전조등으로 비춰가며 조심스레 오고 갔다.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면 제주는 하얀 고깔로 변해간다. 고깔 꼭대기인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하얗게 변해서 천백고지, 오일륙 도로, 번영로와 평화로, 중산간 도로로 하얀 등고선이 점점 내려와 해안에 이르기까지 조용한 백색 침잠이 일어난다.

제주시나 서귀포시를 빼면 한라산 발꿈치인 해안 마을에서나 일주도로를 통해 조금씩 움직일 뿐 나머지는 은박지를 담요처럼 뒤집어쓰고 내리는 눈을 통째로 맞고 앉아있는 키세스 시위대처럼 그렇게 묵직하고 덤덤하게 버틸 뿐이다.


육지보다 기온이 높아도 바닷바람 때문에 추위가 뼈에 스며들면 제주의 겨울도 여지없이 엄혹했다. 그래도 이삼일만 지나면 눈은 녹을 거라는 걸 다들 믿었다. 겨울은 그렇게 지나갈 것이었다.

이모할머니집이 바닷가 코앞에 있는 빌라였고 겨울이면 거센 바람이 모자를 날릴 정도지만 미리에게는 서우봉이 바람을 막아주는 북촌 할머니 집보다 바람이 세찬 김녕 이모 할머니집이 더 익숙하고 따듯한 곳이었다.

북촌 할머니 집과 김녕 이모할머니 집은 차로 가면 10분이 채 안걸렸지만 바닷가 길로 질러가도 어른 걸음으로 삼십분이 훨씬 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이모할머니는 당신이 친정어머니처럼 의지했던 언니, 미리의 할머니로부터 미리를 뺏어오다시피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말로는 뺏어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미리를 보면 화를 돋우며 속을 끓이던 큰언니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그런 할머니에게 온갖 구박과 미움을 다 받는 어린 미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데려와 키웠다는 걸 조금 철이 든 후에 미리는 알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있던 아주 규모가 컸던 이모할머니네 옛날 집은 미리를 데려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가 되었다. 콘크리트를 덮은 넓은 마당이 집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던 이모할머니네 오래전 집은 마당을 둘러싸고 이모할머니와 막내삼촌이 생활하던 안채와 이모할아버지가 주로 생활하던 바깥채, 방앗간으로 썼다던 문간채까지 고루 갖춘 집이었다.

돌아가신 이모할아버지는 수완이 좋은 부농이었다. 중산간인 와산에서 대기업이 소유한 꽤 넓은 면적의 감귤 농장을 임대해서 농사를 지으셨고 차츰 김녕과 송당 쪽에 너른 밭을 사들여 당근과 무우 농사까지 대규모로 지었었다.


이모할머니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해녀였다. 시집오기 전부터 해오던 고단한 물질을 이모할머니는 환갑을 넘겨서까지 계속했는데 돈도 많고 자식들도 다 잘된, 이신 집(부잣집) 마누라가 더 한다고 입을 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모할아버지는 물질을 몸에서 놓지 못하는 이모할머니를 위해 넓었던 집을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건축업자를 끼고 여덟 가구가 살 수 있는 4층짜리 빌라를 지었다. 그 중 두 개 층을 받아서 이모할머니 앞으로 주어 연세를 받게 하였다.

그래도 이모할머니는 물질을 그만두지 못했다. 몸이 아파서 물질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병이 마치 신병 같아서 물질을 하러 물속에 들어가야 통증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물질 때문에 생긴 잠수병인 걸 알면서도 이모할머니는 신병 같은 것이라고 계속 우겼다. 이모할아버지와 장성한 삼촌들은 대놓고 싫은 표시를 내었지만 막내 삼촌이 '어머니가 잡아와서 말아주는 구젱기 물회가 제일 맛있다'고 철없는 척 졸라대며 이모할머니의 물질에 명분을 만들어주곤 했었다.

어촌계 해녀삼촌들은 그런 이모할머니를 부러워하곤 했고 어린 미리를 데려다 아예 끼고 살자 그것조차 호사거리라고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빌라를 짓기 전에는 그 너른 콘크리트 마당에서 이모할머니가 잡아 온 전복이나 소라껍데기를 가지고 미리와 놀아주던 막내 삼촌은 위에 형제들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늦둥이였다.

큰삼촌들이 모두 육지로 대학을 가는 바람에 외동처럼 자란 막내 삼촌은 미리처럼 몸이 가늘고 마음도 여려서 마치 딸처럼 이모할머니 곁을 맴돌며 자랐다.

이모할아버지는 농장 일에 바빠서 얼굴 보기 어려웠던지라 미리가 기억하는 이모할머니 집에는 늘 이모할머니와 막내 삼촌만 있는 적적하지만 오순도순 다정한 모자가정 같았다. 그래서 기대어 살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늦둥이 막내 삼촌이 중학생이 되자 자식 키우는데 이제 잔손 갈 일 없겠다 싶었던 이모할머니가 어린 미리를 데려다 놓고 돌보기 시작하자 이모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사서 하는 고생을 마뜩찮아 했다. 마흔둥이로 태어난 막내 삼촌만이 귀한 여동생이 생긴 듯 미리를 돌봐주곤 했다.

일곱 살을 갓 넘긴 어린 미리가 할머니에게 틈만 나면 모진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으며 지내다가 하루는 북촌에서 김녕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울면서 하염없이 걸어갔고 친구들과 함덕 학원으로 가려고 버스를 타고 가던 막내 삼촌이 미리를 알아보고 버스에서 내려 어린 미리의 손을 잡아 집으로 데려간 것이 시작이었다.


북촌 할머니가 언젠가 한 번, 더 어린 예리를 걸리다 업다했고 미리는 걷게 하며 김녕까지 갔던 길을 떠올려 무조건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걷던 어린 미리를 막내 삼촌이 보지 못했다면 어찌했겠냐고 이모할머니는 놀라서 등을 쓸어줬고, 다시 데려다준 북촌집에서 할머니는 또 미리의 어린 등짝을 때리며 울며 소리 질렀다.

"아방에 어멍에 어린 아시(동생)까지 다 잡아먹은 년이 몰명혼 짓만 하영 하니(멍청한 짓만 많이 하니) 나가 용심이 안 나크냐(화가 안나겠냐)"

"하이고 성님도 야가 경 멩글암수과(애가 그렇게 만들었겠냐). 아 앞에서 경 고루면 되쿠과(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이 년 상아리(얼굴)만 보민 속에 것이 다 올라왕 곤죽(흰죽)도 안 넘어갈크라. 이추룩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멘. 나는 살아지크냐.(살아지겠냐) "


그때 어린 미리는 할머니들이 주고받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육지에서 태어나 자라다 문득 제주도에 옮겨진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모든 언어가 낯선 나라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자신을 대할 때의 눈빛과 표정과 목소리와 행동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든 순간 알 수 있었다.


죽어라고 미리를 미워하던 할머니가 다행히 미리보다 두 살 어린 예리는 품에 안았다. 할머니가 울고 싶을 때는 예리를 끌어안고 울었고 밥 먹을 때도 한 숟갈 한 숟갈 먹여주며 귀히 여겼다.

미리는 죽기 살기로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예리는 죽기 살기로 예뻐하기로 작정한 듯이 극과 극의 감정을 두 손녀딸에게 품어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소리소리 지르며 미리에게 화를 내면 너무 어렸던 예리는 무서워하며 할머니 방에 들어가 이불장 옆에 붙어 부들부들 떨었고 미리가 등짝이라도 한번 맞으면 그때 쫒아 나와 '언니 때찌 하지 마.'라며 미리를 붙잡고 울었다. 할머니의 욕설과 손찌검은 아기 같은 예리가 울어야 끝이 났었다.


미리를 북촌으로 데려다주러 갔던 날 무서워하던 미리 손을 잡고 가며 마음을 안심시켜 주던 영천이 삼촌은 그날 이후 하교 하면 함덕에 있는 보습학원에 갔다 오는 길에 북촌에 들러 한 번씩 미리가 어찌 지내는지 살펴보았고 혹시라도 혼자 울고 있거나 이모에게 욕을 먹고 있으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틈만 나면 미리를 데려와 얼굴을 씻기고 달래주며 돌봐주던 영천이 삼촌이 아니었으면 이모할머니도 미리를 데려다 키울 생각을 차마 못했을 것이다.


이모할머니는 미리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아예 데려왔고 앞으로는 본인이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예리만 있으면 된다고, 제삿날도 오지 말라며 미리 옷가방을 챙겨 마당에 집어던지며 또 울부짖었었다.

미리는 이모할머니 밑에서 조용히 자랐다. 미리가 육지에 있는 지방대에 입학하자 북촌 할머니가 통장을 하나 들고 김녕으로 건너왔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애기였던 남동생이 사망하고 나온 보험금 일부라며 방도 얻고 교육비로 쓰라는 것이었다.

대신 제삿날은 오라고, 시집갈 때 줄 건 따로 있지만 그건 제삿날 꼬박꼬박 와야 주겠다며 조건을 달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제삿날마다 이모할머니 손에 이끌려 북촌 할머니 집에 가면 그때마다 피맺힌 욕설과 악다구니를 들었던 것도 초등학교 때까지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사춘기가 온 미리가 아예 제삿날 가지 않겠다고 도망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가능한 북촌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었다.

미리는 제삿날 와야 한다는 할머니의 조건이 고마웠다. 미리는 예리를 만나러 가끔 북촌에 들르거나 김녕이나 함덕에서 약속을 하고 만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할머니 몰래 만나느라 둘 다 조마조마했고 서두르기 일쑤였다. 예리가 고등학생이 되자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던지 미리를 낯설어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해서 만나기 어려웠던지라 예리와 다시 가까워질 기회를 찾고 있을 때였다.

미리가 지방대를 나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그만두고 제주에 돌아오지 않은 채 기간제 교사를 하며 여기저기 떠돌던 동안 예리는 여전히 할머니 옆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보건 대학을 다니던 예리는 동아리 활동으로 춤과 연극에 빠져 지내더니 아예 자격증도 안 따고 작은 소극장에 매달려 지낸다고 했다.


체격이 크고 성격도 괄괄했던 이모할아버지는 심장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월정리에서 카페를 하던 영천이 삼촌이 바로 카페를 관두고 그래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어서인지 감귤이나 당근 가공사업까지 겸하며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고 여전히 이모할머니 곁에 살고 있었다.


이모할머니는 할머니하고 띠동갑 차이가 났다. 나이 차이만큼 이모할머니는 할머니를 어려워했고 어머니 대하듯 늘 가까이서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었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웠던 예리가 오 년 전, 할머니를 두고 부산에 있는 극단으로 간다고 떠나버리자 영천이 삼촌이 사나흘에 한 번씩 할머니를 찾아보며 살펴주고 있었고 주무시듯 돌아가신 할머니를 발견한 것도 영천이 삼촌이었다.

추운 계절에 돌아가신 것도, 돌아가신 지 하루 만에 발견한 것도 다행이라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이모할머니는 거듭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서서 중문을 넘자마자 이모할머니는 비로소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성님... 우리 성님.... 잘 갑서양. 잘 갑서양. 눈 멜라지게(진무르게) 보고 잡던 아들이영 메누리영 손지영 몬딱(모두) 만나소.... 아이고... 잘 갑서양. 잘 갑서양."

이모할머니는 한 번도 미리 앞에서 할머니가 아버지와 하나뿐인 손주였던 아주 어렸던 남동생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막내아들이 손 붙들고 데려온, 아방 어멍에 어린 아시까지 다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뜻도 모르는 나이에 수도 없이 들었던, 맞거나 울어서 빨개진 얼굴과 목이 잠겨 쉰 소리로 꺽꺽거리던 미리 앞에서는, 뼈에 사무쳤을 할머니의 당연한 그리움을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 미리는 알고 있었다. 미리는 주저앉아 우는 이모할머니를 안고 같이 울었다. 미리와 이모할머니는 각자의 울음 끝에서 서로의 슬픔을 보았다.

이모할머니는 당신 언니의 삶 깊숙이 흔적을 남긴 아픈 기억의 한 자락에 외롭게 서 있던 미리의 서러움이 생각나서 더 오래 울었고 미리는 어린 그녀 때문에 당신의 언니를 탓해왔던 이모할머니의 마음고생이 느껴져서 더 오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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