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의 시간 epi. 8
밤새 눈이 내렸다. 이른 새벽이라고 해도 푸르스름한 여명이 올라와야 하는데 하늘이 여전히 어두웠다. 눈은 잠시 소강상태였지만 내일 늦은 오후에야 눈이 그칠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이모할머니는 빈소를 지킬 아들 친구들에게 먹일 밑반찬 몇 가지를 챙겼다. 집에서 좀 더 쉬고 계시라고 미리가 여러 차례 말렸지만 이모할머니는 엄마같은 언니가 가는 길인데 어찌 집에서 편히 있겠냐고 마다했다.
“느영 큰 아방들 오민 그때 올꺼 달마. 남은 날이 하영 쉬는 날인디 무사 자빠져 있을크냐.”
(너희 큰아버지들 오면 그때 들어와 쉬겠다 남은 날이 죄다 쉬는 날인데 어떻게 쉬고 있겠냐)
미리도 이모할머니도 눈과 마음이 퉁퉁 부어있었지만 조금은 편해진 얼굴들이었다.
농장에 들러 귤 상자들을 챙겨 온 영천이 삼촌이 집에 들렀다.
“작은 형님네는 상철이가 공항에서 대기 중이라 하곡 큰 형님네도 김해 공항 근처 호텔에 몬딱 방 잡아 있댄마시. 자식들이영 며느리 손주들이영 오민 잘도 많을 거라.”
“함덕에 방 좀 잡아 노라. 눈 그치고 관광객들 몰아쳐 들어오민 방 어실(없을) 수도 있을켜. 방 두세 개 딸린 거로 세 채 정도 잡아 연락해라. 니영 형이영 예약 겹치지 않게.”
“알암수다.”
다들 알아서 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이모할머니는 세상을 뜬 언니의 멀고먼 자식들 가족들의 잠자리까지 챙겼다.
미리네랑 성이 다른 강 씨 큰 아버지들은 할머니의 정식 혼인관계의 아들들이었다. 할머니가 당신 가족관계에 올리지도 못한 현 씨 성을 가진 미리 아버지를 어른 모시듯 모시고 사는 내내 정작 당신 호적에 올라있는 강 씨 아들 형제들은 남의 자식처럼, 주워다 기르는 아이들처럼 키웠다고 어린 미리는 귀동냥으로 들었었다.
그들은 미리가 큰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멀기만 한 핏줄들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명절에 한두번 본 게 전부였던 그들이 가족을 데리고 거의 분대 규모로 몰려온다고 한다. 그들은 당당하게 정식 상주로서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를 참이다. 미리야말로 법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할머니에게 그들보다 더 먼 관계일 수도 있다. 미리는 자신이 이미 상주같지 않은 상주임을 알고 있었다.
예리가 할머니 치마 폭에서 자랐고 오 년 전까지 할머니 곁에서 살았던 예리 역시 법적으로는 미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예리는 할머니 말년에 할머니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예리는 여전히 연락도 안 되고 있었다.
미리와 예리의 아버지인 현씨 성을 가진 아들은 아버지 덕에 육지 대학을 간 후로 명절과 생신 외에는 어머니 곁에 단 한시도 머물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의 결혼식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친아버지 현씨가 왔고 자신과는 법적으로 무관한 어머니를 모셔서 혼주 자리에 앉힘으로써 어쩌면 어머니의 맺힌 한을 조금은 풀었을지도 모르고 자신 역시 자식으로서 처음으로 그 둘을 부모로써 공손하게 대접했었는데 그것 뿐이었다.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강씨 아들들과 함께 상주로써 당당하게 제 역할을 했을지 미리는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삶에는 만약이라는 게 설정 불가능한 차원이므로 고개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강씨 아들들도 현씨 아들도 그 누구 하나 옆에 살며 오순도순 모자관계를 엮으며 살 수 없었던 할머니 역시 막내인 현씨 아들이 아내와 아들까지 태운 채 저수지로 빠진 차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에야 유골함으로 돌아온 아들을 온전히 품 안에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세 개의 유골함 말고도, 그 차에 타지 않고 집에 남겨져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두 손녀딸이 할머니에게 같이 돌아왔다.
미리 부모의 장례식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육지에서 치러졌다. 이모할머니가 연락을 했을 테지만 미리의 기억에 아버지의 강씨 형제들이 왔었는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렸던 미리의 기억에는 제주로 함께 왔던 이모할머니네 가족들이 분주히 미리와 예리를 챙기면서 장례를 치르고 여러 가지 뒤처리들을 도맡아했던 기억뿐이었다.
현씨 집에서도 당연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현씨 가족관계에 끼어든 난데없는 불청객이었던 미리의 아버지는 그저 과부였던 할머니가 생활비를 받아먹기 위해 육지총각을 홀려서 미끼로 낳은 아들이라고 현씨네 처가로부터 모진 구박과 소외를 받은 전력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한참이 지난 뒤에 당시 할아버지 현씨가 다녀갔었고 그 후 일 년도 안 돼 할아버지 역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걸 이모할머니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에겐 신행 온 첫날 따끈한 접짝뼈국을 같이 나눈 강씨 남편이 있었고 아들도 둘이 있었는데 4.3때 고문받고 다리를 절던 강씨 남편은 생계를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동생과 어린 아들들까지 데리고 호구지책을 마련해야했는데 그 때 북에서 내려왔던 서북청년단 현씨를 잠시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그때 아이를 임신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역시 같이 북에서 내려왔던 교회 목사의 딸과 결혼 약속이 잡혔고 이후에 임신한 할머니를 모른 체 했다고 했다. 아니면 헤어진 뒤에야 임신한 걸 알았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이후 애비도 모르는 갓난쟁이까지 삼형제를 키웠고 호적이 없던 셋째 아들이 다섯살 쯤 되었을 때 초등학교 입학 문제를 고려해서 결국 이미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아 잘살고 있던 현씨를 찾아갔다고 했다. 씨도둑은 못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닮은 아이 때문에 결국 호적에 올리고 아이는 현씨네와 상관없이 키우기로 했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했다.
현씨는 처음엔 나 몰라라 했고 할머니가 몇 번씩 찾아가야했는데 목사 가족이라는 처가식구들이 찾아와 온갖 비난과 모욕을 서슴지 않던 상황에서 현씨에게 남몰래 맞기도 했다고 들었다. 독이 오른 할머니는 끝내 꺽이지 않았고 현씨를 만나던 상황을 증언해줄 이모할머니와 동네 삼촌들까지 찾아내 같이 가서 애원하기도 하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는 뒷이야기를 이모할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바 있었다.
이모할머니는 몰매 맞고 온 언니가 정신을 놓고 늘어져 지내자 자신이 독이 올라 어머니들같던 좀녀삼촌들과 같이 떼지어 찾아가 해결을 봤다는 얘기를 돌려서 말해왔다는걸 미리는 나중에 알게되었다.
미리 아버지를 현씨 호적에 올리고 양육비처럼 받은 적은 돈이 행여라도 세간의 떠도는 말처럼 막내인 현씨 아들이 정말 강씨 형제들을 키우는 미끼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할머니는 안해야하는 연극까지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이모할머니로부터 들었지만 강씨 형제들이 그런저런 생각까지 사려깊게 하면서 컸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미리가 듣기로는 강씨 형제들은 막내 동생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차례로집을 나간 후 그들의 어머니와는 절연하다시피 살아온 것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할머니에겐 사랑이 샘솟는 우물을 팔 시간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미리에게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따듯한 미소나 다정함, 마음의 여유, 느긋함같은 단어들을 떠올릴만한 기억들이 거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씨 아들만을 자식처럼 키웠다는 할머니라서 강씨 형제들이 겪었을 마음 속의 그림자가 미리와는 다른 코드였겠지만 그 결핍에 공감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그건 미리 생각일 뿐이다.
공감과는 별도로 여전히 미리에게는 그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할머니의 장례를 치러야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 눈보라가 끝나면 그들이 올 것이고 멀리 도망갈 수도, 그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무거운 시간들이 미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이모할머니랑 영천이 삼촌만 있으면 괜찮다고 미리는 마음먹고 있었다. 예리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전화 연락조차 안 된다는 사실이 칼날처럼 날아오는 눈보라만큼이나 두렵고 조바심 났지만 표현할 수도 없었다.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빌라를 나서자 성긴 눈발이 거의 수평으로 날아와 얼굴을 휘어 감았다. 바람에 단발로 자란 머리채가 풀어져 뒤집어지며 머리칼이 각막을 때린 건지 눈알이 쓰리고 아파서 미리는 조심스레 얼굴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떼어내야 했다. 영천이 삼촌이 우산을 펼쳐 이모할머니 머리에 씌웠지만 우산도 금방 뒤집어져버렸다. 미리는 이모할머니 팔을 붙잡고 다시 빌라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영천이는 강 차 개져오라. 무사 아침부터 돗갱이 보롬추룩 불엄시냐.”
(영천이는 가서 차 가져와라. 어째 아침부터 회오리바람처럼 바람이 부는 것이냐)
돗갱이 보롬이라는 말에 미리는 우찬이 생각이 났다. 눈길에 공항에서 함덕까지 오는 것도 편하지 않았을 텐데 지난밤에 숙소로 바로 가지 못하고 빈소 앞을 공연히 두어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걸 슬쩍 보았지만 쫓아 나가 아는 척 하지 못했다.
'이제 일어나서 아침은 먹었을지.'
집까지 가는 길도 험하겠다 싶어 걱정되었지만 전화를 할 마음의 여유는 아직 없었다. 미리는 장례식장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문자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돗갱이 보롬은 회오리바람이다. 이모할머니는 작으나 크나 돗갱이 보롬을 무서워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돗갱이 보롬을 용오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이 승천하듯 거센 물보라가 회오리치며 돌아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으며 바닷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이다.
멀쩡하던 바다가 갑자기 호로록 뒤집어지며 물살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도 하는데 이모할머니는 바다 속에서 돗갱이 보롬이 바닷물을 끌어 올려 몰고 다니는 모습을 올려다본 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황당한 모습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바람에 쓸려 올라가면 어느 육지에 후드득 던져질지 모른다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씀하시곤 했다.
이모할머니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미리에게 동기화되던 시절이었지만 돗갱이보롬만큼은 달랐다. 미리는 자신이 회오리바람 위에 올라가 어디론가 멀리 던져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모할머니에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 말하진 못했었다.
미리는 우찬이 머리에서 은행잎을 떼어주던 그날 자신이 돗갱이 보롬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돗갱이 보롬은 오래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회오리바람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미리는 우찬이 금방 그녀 곁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웠지만 이제 회오리바람이 끝날 때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를 빌라 입구에 갖다 대며 막내 삼촌이 투덜거렸다. 눈이 와서 농장에서 쓰는 사인승 트럭을 끌고 다녀야하는데 차가 더럽다고 조수석의 먼지를 터느라 바빴다. 간밤에 농장에 주차시켜놨던 차 앞뒤 유리에 눈이 얼어붙어서 그거 녹이고 오느라 히터를 풀로 켜야했다고 차 안은 따뜻할 거라고 했다.
작은 김녕 읍내도 얼어붙어 있었다.
백련사 지나 합류한 일주동로도 고요했다. 눈보라는 여전했고 사람들은 모두 따듯한 동굴 속으로 숨어든 것 같았다. 눈보라가 맞바람으로 부딪히는 바람에 윈도우 브러쉬가 거친 숨을 내쉬며 바삐 움직여야했다.
미리네처럼 구지 움직여야 할 사람들만 드물게 얼어붙은 눈 쌓인 도로에서 북북 기며, 설설 구르며 어떻게든 이동할 뿐인 듯, 길게 이어진 두 줄기 바퀴자국 외에는 온 천지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었다.
태풍이나 폭설 때문에 길이 끊어지면 육지에 나가 사는 상주들은 들어올 방법이 없다. 그들을 기다리느라 제주의 상가에서는 종종 사일 장도 드물게는 오일장도 치러진다.
결혼식조차 가족들 없이 치르는 일이 가능한 곳이 제주다. 미리의 고등학교 동기 중 하나는 육지 신랑을 만나 시댁이 있는 도시에서 결혼식을 하러 먼저 나갔는데 하필 결혼식 당일 제주에 태풍이 들이닥쳐 친척들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신부와 함께 먼저 나간 어머님과 여동생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는데 친척들 챙겨서 같이 나가려다 결혼식 참석을 못한 아버지 때문에 신부가 혼자 입장을 해야했지만 혹시나 하고 어머니라도 먼저 나갔던 게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었냐고 하마터면 신부가 엉엉 울 뻔했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말하던 동기들 얘기가 떠올랐다.
장례가 길어져도, 결혼식에 친척들이 참석을 못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제주다.
적도 가까운 필리핀 동쪽 바다는 더운 호흡을 뱉어내며 부지런히 시원한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며 움직인다. 더운 호흡이 지나치게 거칠어지면 여지없이 대만 아래쯤 해역에서 태풍으로 커지고 대만이나 중국 동쪽 해안으로 올라가면 열을 내리고 작아지거나 소멸했고 대만이나 중국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북동쪽으로 선회하며 더 거칠고 빠른 속도로 구름덩어리를 키워 일본 규슈나 제주로 올라온다.
뭐든 차이가 커지면 그 차이를 없애기 위해 난리가 나는 법이다. 바닷물이 고여있지 않고 흐르는 것도 위도 차에 따른 기온차가 만들어내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바닷물을 저위도에서 고위도로 밀어 올리거나 반대로 고위도 저위도로 끌어내린다.
바닷물이 바람에 밀려 빠져나간 곳은 저 깊은 심해에서 물이 대륙사면을 타고 꿈틀거리며 올라와 채워준다. 바다와 하늘은 끝없이 온도차와 기로 인해 생긴 기압차를 메우느라 이리저리 흐르고 오르내리느라 바쁘다. 어떤 물리적 차이 없이 고요한 행성은 죽은 행성일 뿐이다.
흐르고 움직이다 부딪히면 난리가 난다. 거칠 것 없던 바다 위의 쾌속질주는 바다 위에 솟은 그 어떤 것을 만나더라도 부딪쳐 극복해야한다.
땅과 바다의 온도차는 극명하게 벌어진다. 속성이 그만큼 다른 것이다. 태풍은 땅을 만나야 순해진다. 섬이든 육지든 바다 위로 솟은 땅을 만나면 붙잡고 씨름하느라 힘이 빠진다.
남해 아래쪽 바다 한가운데 홀로 우뚝 선 한라산이 태풍을 감아 안으면 육지로 올라갈 태풍은 잔뜩 머금은 물을 몽땅 뱉어내고 비로소 순해진다. 여름은 그래서 한라산 남쪽에 비가 많다.
겨울에도 바다의 속성은 다르지 않다. 다 받아들이고 힘을 빼고 나서야 넘겨주는 한라산의 속성도 다르지 않다. 제주를 지나 북상하는 해류는 주위보다 온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따듯한 바다는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냉기를 만나 증발하며 수증기를 잔뜩 뿜어 넣는다. 습기 많은 공기는 한라산을 타고 올라가며 구름이 되어 눈을 뿌려댔고 산을 넘어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비로소 마르고 포근해지기 마련이라 겨울에는 애월이나 한림에 눈이 많이 내렸고 성산이나 남원은 비교적 따뜻하고 건조해졌다. 반대로 여름에는 구좌나 남원에 비가 많이 내렸다. 한라산 치마자락 여기는 비가 내리고 저기는 건너 띄는 날씨에 말 잔등을 쪼개가며 비가 내리고 눈도 내렸다.
제주를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미리는 언제나 제주의 날씨에 신경을 썼다. 날씨가 나빠도 바다에 나가고 싶어했던 이모할머니 생각에 자신이 살던 지역의 날씨보다 제주 동부해안 날씨를 매일매일 체크했었다. 이렇게 이삼일 넘게 계속 눈이 내리는 일은 육지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제주는 말할 것도 없이 드문 일이다.
미리는 조수석 창 너머 바다는 하늘과 같은 색이었다. 흑회색과 밝은 회색이 백 가지 정도로 나뉘어서 엉켜있는 바다를 보며 언제나 하늘빛을 담아내느라 바쁜 바다의 본래 색이 문득 궁금해졌다.
이모할머니는 미리에게 바다 자체였다.
테왁을 메고 검은 고무 옷을 입은 이모할머니가 떠오르는 해를 가슴에 안고 바다로 들어갈 때도, 지는 해를 마주 보며 바다에서 나올 때도, 때로는 배를 타고 나가 작은 여에 해조류를 따러 나갈 때도 이모할머니는 미리에게 바다의 여신이면서 동시에 미리의 수호신이었다.
바다 속에서는 시간이 멈춘다고 했다. 물 밖 세상과 상관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자유로웠노라고 이모할머니는 어린 미리에게 고잔고잔 얘기하곤 했다.
물에만 들어가면 이모할머니는 늘 열세 살 어린 좀녀처럼 설레었고 열다섯 겁 없는 비바리처럼 두려움이 없었노라고, 삼십도 되기 전에 남들보다 빠르게 상군이 되었어도, 오십이 넘어서도 물에만 들어가면 열다섯 살 적 팔다리가 되어 자맥질을 하고 스무 살처럼 춤을 추듯 오르내리며 바다와 하늘과 땅이 다 하나처럼 곱고 그걸 누리는 모든 시간들이 기쁘고 감사하다며 미리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여며주며 미리 눈을 마주 보고 얘기하곤 했다.
미리에겐 그때의 이모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자신이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리가 할머니 따라 해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이모할머니는 언제나 펄쩍 뛰었다.
“무사 또 경 고람시냐. 나영 몸에 병 잠재우려고 죽자 사자 했지만 너는 안되마시. 느영 할머니도 펄쩍 뛸 일이라. 입도 뻥긋 마라.”
이모할머니는 미리에게 물질의 ㅁ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미리는 할머니 따라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이모할머니 얼굴이 얼마나 싸하니 굳었는지, 말투조차 얼마나 팩팩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모할머니가 저렇게까지 할 때는 못하는 거다, 아니 안 하는 것이 맞다 생각하고 해녀가 되고 싶은 꿈을 그 어릴 적에 이미 접었었다.
해녀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자치도에서도 어촌계마다 후계자 양성에 신경 써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다. 해녀가 관광자원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 자체가 보호 대상이 되어버렸다. 해녀 일에 뛰어드는 육지 출신 지원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끝까지 버티며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해녀는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뭍에 것인 사람이 다른 삶의 영역인 물에 뛰어들어 마치 원래 물의 것인 양 헤엄쳐 다니다가 솔래솔래 물의 생물들을 꺼내 와야 하는 일이었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물의 신들도 뭍에 것들이 탐욕을 부릴 땐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모할머니는 어린 미리를 붙들고 귓속말하듯 말하곤 했다.
“욕심 내지 말앙 살아야 할 켜. 명심해사쥬. 물에서도 뭍에서도 욕심이 사람 잡아가는 귀신이라.”
이모할아버지가 뇌졸중이 와서 병간호할 상황이 되어서야 이모할머니는 물질을 멈췄지만 대신 언제나 하루 중 반나절은 할아버지와 함께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모할아버지의 뇌졸중은 약한 증상이었지만 이모할머니 앞에서는 엄살을 심하게 피우셨고 이모할머니가 흉을 보며 투덜거려도 그게 할머니의 물질을 멈추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고육지책이었음을 막내삼촌에게 전해 들어서 알게 되었다.
이모할머니네 식구들은 말이 없었다. 다들 툭툭 한두 마디 외에 대화를 길게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언제나 툭툭하는 말 뒤에 서로를 챙겨주고 배려하며 아끼는 모습이 숨어있었다. 미리가 이모할머니네를 알기 전에는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던 따뜻함이 이모할머니 집엔 언제나 있었다. 그 따뜻함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예리도 이모할머니네서 같이 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지만 어림없는 희망이었다.
심장에 박힌 가시 같던 미리를 이모할머니에게 보내고 예리 하나만을 곁에 남긴 할머니는 오롯이 예리를 사랑하고 예리에게 남은 모든 것을 의지하는 듯 했다. 할머니에게서 예리를 데려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모할머니도 일언지하에 ‘그건 할 짓이 아니다.’ 라고 못 박았다.
예리도 미리처럼 이모할머니 집에서 같이 따듯하게 사는 것이 왜 할 짓이 아닌지, 할머니에게서 예리를 데려오는 일이 왜 할 짓이 아닌지 혼란스러웠지만 차츰 예리를 데려오는 것은 포기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더구나 자신이 이모할머니 집에서 사는 것이 눈칫밥 먹는 정도는 아니어도 당연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의 눈빛과 한 번씩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어린 미리는 이모할머니네 식구들의 사랑을 고마움으로 답해야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어려웠고 안다고해도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버거웠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미리가 처음으로 영천이 삼촌과 통화하며 고맙다는 말을 했던 것은 여기저기 떠돌며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다가 다시는 안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사직서를 낸 후 배낭여행을 하며 미국을 떠돌던 때였다.
미리는 처음으로 전화기 너머 멀리 있는 피붙이의 목소리가 고막에 꽂히는 것처럼 가까이 들으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끝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미 중서부를 버스와 렌트카로 떠돌던 때였다. 계곡을 따라 거친 물이 흐르고 침엽수림이 울창한 숲 길을 지나기도 하고 칠월에도 눈이 내리는 로키산맥 주위를 헤매기도 했었다. 30년 전의 대화재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어린 숲을 지나면서 온통 노란 절벽 사이로 흐르는 폭포와 계곡을 만나기도 하고 하얀 석회암 테라스에 찰랑거리는 옥빛 물이 만드는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노랗고 붉고 희끗한 황 냄새가 아른아른하게 피어오르는 옐로스톤 공원을 두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보글거리는 머드 팟 사이로 난 목재 트랙을 따라 걷다가 만난 깊은 초록의 핫 스프링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찾아갔던 거였다. 그 깊고 신비한 바하마블루와 에메랄드 빛 스프링 앞에만 서면 두려움과 함께 막연한 그리움이 끝도 모를 심연처럼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다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두번째 와서야 그 깊은 그리움 끝에 김녕 이모할머니집 근처의 푸르고 초록한 바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날이었다.
영천이 삼촌은 멀고 먼 미국 땅에 여행가서 느닷없이 전화 걸더니 고맙다며 왁왁 울어대는 미리의 전화에 놀라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김녕 이모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고 아득하고 아슬아슬했던 어린 시절에 비로소 만났던 따듯함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미리에게 그리움의 색깔은 노마드처럼 떠돌다 두 번씩이나 들어서게 했던 살아있는 화산의 화구 한가운데서 만난 핫 스프링 위로 떠오르던 김녕 바다의 색이었다.
영천이 삼촌은 미리의 삶이 여전히 삭막함만 가득한 것인가 싶은 안타까움 때문에 우선 놀랬고 그다음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긴장했기에 떨리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두서없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영천이 삼촌과 미리의 통화는 두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어구도 엉망인 당황한 제주어와 그저 외롭고 그리운 표준어가 뒤섞여 각자가 하고 싶은 말로 가득 찬 대화였다.
그날 영천이 삼촌은 미리를 찾아 미국엘 가야하나 고민했다고 나중에 얘기했다. 영천이 삼촌은 미리가 울더라는 말은 하지 않고 대신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만 전하더라고 이모할머니가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