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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처럼 당신과 얽힐 수 있다면

미리의 시간 epi. 5

by 우유강

“가고 싶지 않아.”

미리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았다. 우찬도 섣불리 미리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가고 싶지 않다는 미리의 말끝이 흐려졌다. 동그랗게 등을 말아 소파 쪽으로 돌아앉는 미리가 위협을 앞에 둔 작은 콩벌레같이 느껴졌다.

콩벌레가 몸을 동그랗게 말 때는 그냥 놔둬야 한다. 손을 대면 댈수록 더 동그랗게 말아버릴 거였다. 한참을 놔둬야 비로소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하고서 몸을 풀고 어디로든 움직이는 것을 어릴 적 충분히 경험했던 우찬은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미리를 그냥 놔두고 잠시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비행기표는 서둘러 예매해야 했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대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12월부터는 목요일 오후부터 저가의 제주행 비행기 표들은 남아있는 게 없다시피 했다. 코로나가 지나면서 해외여행 봇물이 터졌고 제주행 비행기들이 근거리 해외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코노미 석을 십오만원 가까이 되는 정가대로 사거나 아니면 항공사 코너에서 기다리다 비상용 대기좌석이 이륙 코앞까지 그대로 공석으로 남는 티켓을 구하는 방법도 급할 땐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비행기 표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찬이는 그냥 돌아가.”

쪼그려 앉아있던 미리가 일어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울어서 벌게진 눈가가 창백한 미리의 얼굴에 오히려 생기를 보태주고 있었다.


“티켓팅은 내가 해줄게. 당신은 가방을 좀 싸지. 챙겨갈 것이 많을 것 같아.”

우찬이 이어서 다소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이든 할머니 댁이든 근처까지라도 데려다줄게. 그것까지는 내가 하게 해 줘.”

미리가 소파에서 부스스 일어나 우찬을 보며 낮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북촌이랑 성산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 알잖아. 성산이 고향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좀 늦었다는 걸 알았는데. 도망칠 기운이 없었는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망가지 못했어. 너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이미 내겐 너무 벅차.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우리 둘만의 시간과 공간만 허락된다면, 가능한 한 오래오래 같이 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찬이 니가 뭐라고 하든. 결국 너랑 내가 살아온 배경이나 너랑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또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그 얽힘들 때문에 더 많은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관계가 변해가는 걸 원하지 않아. 두려워. 감당할 자신이 없어.”

미리는 꾹꾹 눌러서 말을 이어갔다. 얼마나 힘들여 말하는 건지 듣고 있는 우찬도 힘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미리가 한참 있다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 갔다.

“찬아. 그냥 똑 떨어진 나만 바라봐주면 안 될까? 나를 만들어준 내 지나간 시간들 속의 사람들과 나를 함께 떠서 안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 이전까지 니가 알고 있던 ‘나’만 골라내서 조금만 더 같이해주면 안 될까?”

발코니의 갈색 버티컬은 모처럼 활짝 열려있었고 흐린 겨울의 낮은 햇살이 미리의 얼굴 뒤에서 역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배 쪽으로 끌어안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쿠션을 화장실 밖으로 집어던지고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토를 하기 시작했다. 미리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우찬은 이미 알겠어서 속으로 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점심에 먹었던 찐 양배추가 소화가 덜 된 채 노란 위액에 섞여 나오는 게 보였다.

우찬은 미리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았다.

우찬이 미리의 등을 쓰다듬어 내려줬다. 조금만 긴장하면 딸꾹질하고 툭하면 파르르 하며 손끝을 떠는 미리의 예민함을 이미 알고 있던 지라 우찬은 미리가 토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일단 좀 쉬자.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 따듯한 물을 좀 마시게.”

미리를 부축해서 안방 침대에 눕히고 우찬이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정방형의 식탁 위에는 고사리가 살고 있는 작고 납작한 유리그릇 하나와 커피주전자 하나가 있었다. 뚜껑 꼭지와 손잡이, 가열기 부분이 밝은 우드 색이고 몸체가 하얀 전기주전자였다. 커피도 마시지 않는 미리가 커피주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유리 접시에 담긴 고사리는 갈색의 다공질 현무암에 뿌리 일부를 부착시키느라 낚시 줄로 살짝 묶여 있었고 작은 바위의 일부는 두꺼운 이끼로 덮여 있었다. 장식이 거의 없는 미리의 집에 화분이 몇 개 있었는데 파키라 화분 두 개와 고사리 화분이 대여섯 개 있었다. 미리는 파키라가 얼핏 팔손이처럼 보여서 팔손이인 줄 알고 사 왔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팔손이나 고사리가 제주에서 가장 흔한 식물 종이라는 걸 우찬은 비로소 깨달았다.

진실의 미간이 있다면 진실의 심장도 있을까? 심장 한쪽이 저절로 찡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에 우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바탕 끓어 오른 물을 머그잔에 붓고 다시 찬물을 더 섞어 백탕을 만들어서 온도가 적당한지 한 모금 마셔보고 미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소동이라면 소동이었을까? 소파 뒤에 숨어 있던 니모가 슬그머니 기어 나와 어느새 안방 침대에 누워있는 미리에게 다가가 미리의 어깨에 이리저리 몸을 비비다 붙여 앉았다. 니모가 처음으로 우찬을 피하지 않고 미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를 만들어준 내 지나간 시간들 속의 사람들과 나를 함께 떠서 안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 이전까지 니가 알고 있던 ‘나’만 골라내서 조금만 더 같이해주면 안될까?' 라는 미리의 말 속에서 우찬의 뼈를 울리던 말은 '같이해주면 안될까?'였다. ‘조금만 더 같이 해주면 안 될까?’라던 미리의 말은 그날 우찬의 피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말은 우찬의 귀 속에서, 우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울렸었다.

우찬은 미리가 그 말을 할 때, 문득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미리가 손을 내밀었던 맨 처음 순간은 노란 은행잎이 우찬의 앞머리에 떨어져 흔들리고 있을 때 거의 초면이었던 미리가, 당황하여 딸꾹질을 하던 미리가 손을 내밀어 그 은행잎을 떼어내려고 했을 때.

미리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동굴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던 사람이 소리 죽여 내뱉은 숨 깊은 하소연처럼 가늘지만 낮게 기도를 긁으며 올라왔다.

우찬은 미리의 눈을 보았다. 미리의 눈빛은 보통은 고양이처럼 차고 확고하며 흔들림 없었지만 지금은 막 구조된 어린 니모 같은 눈빛이 이랬을까 싶었다. 눈물과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이 섞인 눈곱이 가득 붙은, 두려움에 가득 찬 끝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싸우는 방법을 모르면서도 하찮게 하악질 하며 덤비지만 사실은 '나를 살려줘'를 외치는 어린 니모가 느껴졌다.

여전히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숨기만 하던 니모가 미리에게 몸을 기대고 얼굴을 부비고 있었고 우찬이 다가가 미리를 안아줄 때도 니모는 도망가지 않았다.

우찬은 서둘러서 반려동물 돌봄 앱을 가입하고 고양이를 돌봐줄 펫시터를 구했다. 다행이 이십분 거리에 사는 고양이집사와 연결되어 하루에 한 번씩 들러 돌봄을 해주기로 하였다. 니모가 얼굴을 보여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식사와 배변정리만 해줘도 미리의 근심이 옅어질 것이다.


미리는 힘들게 가방을 챙겼고 우찬은 서둘러 비행기표를 구했다. 여행사가 미리 잡아 놓았던 좌석에서 남은 게 마침 있었는지 꽉 찬 가격이나마 예매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서둘러 도착한 공항엔 어설픈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우찬은 날씨누리에서 위성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서해 바다 가득 밭고랑 세우듯이 눈구름들이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해의 바람은 언제나 동쪽으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서해에서 저렇게 솟구쳐 하늘에 일구어놓은 눈 고랑 밭은 온전히 바다가 뱉어낸 가쁜 숨들이 얼어붙어 생긴 것들이다.

저 하늘의 눈밭이 몰아쳐오면 아직은 정상운행 중인 서남해 권역 공항인 인천과 김포, 군산, 무안, 제주 공항은 눈구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 비상근무에 들어갈 것이다. 국내선 항공기를 대중교통처럼 이용해야 하는 제주도민이나 관련자라면 일 년이면 한두 차례씩 태풍 때문에 으레껏 발이 묶이곤 한다. 겨울에도 폭설로 인한 발 묶임이 사오 년에 한 번씩은 일어났고 점점 더 잦아지고 있었다.

눈발이 게이트 밖, 어둑해지는 계류장에서 불어와 환하고 넓은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해 높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미리는 우찬이 조천에 있는 장례식장 근처까지만 같이 가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우찬의 동행을 허락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검은색 의상은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도 왜 미리가 입은 검은 롱 패딩과 돌려 맨 진한 회색의 캐시미어 머플러조차 마치 ‘상복. 상복. 상복.’을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우찬은 생각했다.

‘눈빛 때문일지도.’

창백하고 낮은 미리의 광대 위로 살짝 꺼진 푸르스름한 다크 서클과 그 위로 검어진 눈동자가 습기를 머금은 채 졸아들고 있었다. 겁에 질리고 당황한 슬픈 눈동자 두 개가 그렇게 좁은 비행기 창에 되비치고 있었다. 날개 쪽 창가에 자리 잡은 세 개의 좌석 중에 미리는 창가에 앉았고 우찬의 옆 자리는 빈 좌석으로 남았다. 눈비가 내리거나 약간의 바람이 있어도 이착륙만 가능하면 하늘에서 날아가는 동안은 거의 완벽하게 안전한 법이다. 비행기가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이착륙할 때이다.

거대한 몸집을 하늘로 띄워야 하는 순간은 지구가 잡아당기는 엄청난 중력을 이겨내고 박차 올라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 가장 높은 구름의 끝만큼 높이 날아야 하고 지면을 가르는 고속철도보다 더 빠르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야 한다. 그렇게 날다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중력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지면과의 마찰력을 견제하며 바퀴를 내려 미끄러지듯 몸을 땅에 붙이고 굴러가서 정해진 곳에 정지시켜야 한다.

우찬은 어려서부터 비행기 탑승에 익숙해져야 했고 두려움과 함께 경외감을 가지고 이착륙의 순간을 온몸과 마음의 감각을 동원하며 받아들이곤 했다. 비행기는 장대높이뛰기 선수 같았다. 승객이 모두 탄 뒤에도 비행기는 이륙하는 활주로에서 이륙신호를 받을 때까지 길고 긴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서서히 움직여 앞에 가는 비행기의 뒤를 조용조용 따라간다. 앞에 가던 비행기가 직선의 활주로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면 뒤따라가 똑같이 출발선에서 심호흡을 한다. 이륙 신호가 떨어지면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달려 적절한 때에 솟구쳐 올라간다. 창 밖 지평선이 순식간에 뒤쪽으로 솟구치며 경사진다. 조종석이 있는 앞 쪽이 들리고 몸의 무게가 좌석을 통해 순식간에 느껴진다.


창밖 저 밑으로 어느덧 어두워진 공항 터미널과 부속 건물들과 계류장을 돌아다니던 거대한 동체들이 순식간에 레고 블록처럼 작아진다. 비행기가 눈구름을 헤치며 대류권 상층으로 올라가는데 이삼분이 채 안 걸린다. 눈구름 사이에서 약간의 요동이 있었어도 동체가 수평을 유지하면 승무원들은 음료 접대를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이제 눈과 비를 만들어내는 구름과, 구름을 만들어내는 공기의 요동으로부터 비행기가 자유로워지는 공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제주 공항에도 비행기를 쫓아온 눈구름 때문인지 야자수 잎을 사정없이 때리며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발이 날려도 공항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눈과 바람이 이륙과 착륙을 허락하는 한 공항에는 사람들이 붐빌 것이다.

우찬은 미리와 함께 렌터카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눈길이 어찌 될지 몰라 평소에 몰고 다니는 차와 유사한 차종의 사륜구동을 구해 미리를 옆에 태우고 관덕정 옆을 지나 탑동 쪽으로 가는 길 위에서 우찬은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우찬은 미리를 장례식장에 내려주고 바로 옆 함덕 해변가 호텔에 방을 구한 다음 아버지께 연락하고 내일에나 집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도 없이 눈까지 오는 밤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는 아들을 아무 근심걱정 없이 반길 부모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안에 가까운 일주도로에 내리는 눈은 항상 노면을 스치며 녹았었다. 이번에도 눈이 언제나 그렇듯 빨리 녹기를, 미리가 시리고 칼칼한 눈보라 속에 할머니를 보내지 않기를 바라며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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