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출장에서 복귀한 후, 우리는 곧 향후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콜롬비아 커피 회사 측에서는 LOI(사업의향서) 이상은 제공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혔고, 현실적으로 이 LOI만으로는 한국의 투자자들을 설득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이에 우리는 보다 설득력 있는 투자 설명 자료를 만들기로 했다. 단순히 브랜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해당 커피 회사의 장단점은 물론, 한국 커피 시장의 구조와 트렌드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왜 이 브랜드가 한국에 진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커피 제3의 물결(Third Wave Coffee)', 그리고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라는 개념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단순한 음료로서의 커피가 아닌, 하나의 문화이자 경험으로서 소비되는 흐름이었다. 원두의 산지와 품질, 로스팅 방식, 바리스타의 추출 기술 등 커피 한 잔에 담긴 모든 요소들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한국 역시 그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조사가 깊어질수록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과연 이 치열한 커피 프랜차이즈 시장 속에서 우리가 진입할 여지는 있는 걸까?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처음엔 가능성만 보였지만, 이제는 냉정한 현실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투자 설명 자료의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우리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투자자들과 하나둘씩 미팅을 시작해 나갔다. 제약회사의 대표부터 시작해, 대기업의 원두커피 사업을 담당하는 이사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콜롬비아 커피 브랜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미팅이 거듭될수록 우리의 자료와 전략에서 부족한 점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콜롬비아 커피 브랜드가 요구하는 초기 투자 조건은 결코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리스크는 명확한데, 수익 구조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확신을 주기에는 우리의 준비가 아직 부족하다 느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고, 그 과정 속에서 이 사업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도 점차 깊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히 투자 설명 자료를 다듬고,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제는 본질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투자자 설득이 아니라, 먼저 ‘사업을 실질적으로 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카페 프랜차이즈 사업은 단순히 브랜드와 좋은 커피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브랜드와 제품이 있어도, 그것을 현지 시장에서 실제로 운영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사람—즉, ‘현장 경험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이 사업의 핵심은, 브랜드의 기본적인 가이드라인과 철학 위에, 한국 커피 시장에 대한 이해와 실무적 경험을 갖춘 운영자의 역량이 더해질 때 비로소 시너지가 난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이제 필요한 것은 ‘돈’보다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시장조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브랜드 카페들을 직접 찾아다녔고, 특히 개성이 뚜렷한 카페들을 중심으로 발품을 팔았다. 카페 사장님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시장의 흐름과 분위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현장에서 커피를 팔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의 조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주 찾아뵌 곳이 있었다. 바로 나의 대학 은사님께서 운영하시는 삼청동의 로스터리 카페였다. 교수님은 한국에 커피 로스팅 카페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커피를 직접 로스팅해오셨고, 카페 운영 역시 직접 하여 삼청동에서 꽤나 유명한 카페로 만들어오신 분이었다. 그런 만큼, 나로서는 조언을 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자, 무엇보다 이번 사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카페 프랜차이즈 운영 역량’ 을 갖춘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나의 생각을 교수님께 표현해보았다. 혹시 함께 해주실 수 있을지,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비전이 의미 있다고 느껴지시는지 여쭈어보았다. 하지만 교수님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완곡한 거절의 뜻을 전하셨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셨다.
“이 사업, 정말 쉽지 않을 거야…”
그 한마디는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커피 사업을 해오신 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래서 더 무겁게, 더 진지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이후로 나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 둘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를 이 사장님께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보다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서는, 한국 커피 시장에서 실질적인 운영 경험을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자 이 사장님은 다소 서운한 듯한 어조로 이렇게 되물으셨다.
“그렇게까지 진행되면,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몫이 남겠나?”
이사장님의 답변에는, 자신이 시작한 이 사업의 주도권을 점점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데 대한 불만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 사이에 점점 커지고 있던 생각의 간극을 실감했다. 나는 이미 이 커피 시장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분석과 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반면 이 사장님은 투자자만 확보되면 프로젝트는 자연스럽게 굴러갈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로가 바라보는 ‘성공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 사장님과 각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 이상 함께하는 것이 의미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두 달간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나는 비로소 혼자서 이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지만,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무거웠다.
콜롬비아 커피 프랜차이즈를 한국에 들여오는 일은, 결국 내 몫의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노력과 시간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왕 시작한 이일 ‘커피’와 관련된 무언가를 반드시 내 손으로 이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