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커피 시장을 조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스페셜티 커피’, 즉 제 3의 커피 물결(Third Wave Coffee) 이었다. 미국의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스텀프타운(Stumptown Coffee), 조지 하웰 커피(George Howell Coffee) 등이 그 대표적인 브랜드들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단순한 커피 판매를 넘어, 생두의 산지와 농장 단계에서부터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는 점이었다.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커피 농장들과 직접 교류하며, 생산자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로스팅과 추출을 거쳐 한 잔의 커피로 그 이야기를 소비자에게 전하는 것. 이처럼 ‘커피에 담긴 이야기’ 를 함께 파는 방식은 많은 커피 애호가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 물결은 곧 한국에도 도달했고, 테라로사(Terarosa) 와 같은 로스터리 카페들이 등장하며 국내 커피 시장에도 스페셜티 커피의 흐름이 뚜렷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커피 프로젝트를 접은 뒤, 나는 하루에도 여러 카페들을 찾아다니며, 그 특징들을 바탕으로 시장 트렌드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이어갔다. 그와 동시에,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꾸준히 글을 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피 업계 사람들과의 교류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커피 원두를 납품하는 일을 하던 손 사장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커피 산업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온 그와의 만남은 내게 꽤 큰 전환점이 되었다.
손 사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막연하기만 했던 내 생각들이 조금씩 현실적인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손 사장님은 원두 커피 납품을 전문으로 하며, 하루에도 10곳이 넘는 카페를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영업을 하는 그야말로 ‘뚜벅이 영업’의 장인이었다. 그런 만큼 커피 업계에 대한 보다 실제적 시장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이고 수많은 카페 사장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커피 산업을 겉핥기식으로 바라봤는지를 일깨워주었다. 인터넷 정보, 트렌드, 브랜드에만 머물렀던 내 시선이, 그의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땅을 딛기 시작했다. 시장 구조, 사장님들의 실제 고민, 원두 유통의 생생한 흐름까지—손 사장님의 말에는 현장의 시간이 녹아 있었다. 나는 그 대화 속에서 내가 놓치고 있던 본질을 하나씩 마주하게 되었고, 내 방향을 다시 점검해볼 수 있었다.
손 사장님과의 인연으로, 나는 한동안 그의 ‘뚜벅이 영업’을 따라다녔다. 덕분에 카페 트렌드를 조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새로운 카페가 보이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을 소개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끄는 그의 영업 방식은 타고난 입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사장님들이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특히 젊고 트렌디한 카페의 경우, 자신만의 철학이 뚜렷해서인지 손 사장님의 접근을 곱게 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게 진짜 영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손 사장님은 이전엔 영업을 해 보신적도 없었고, 전혀 다른 업종에서 일하셨던 분이다. 그랬던 그가 ‘커피를 팔겠다’는 신념 하나로 하나씩 거래처를 만들어나가, 결국 수십개의 카페에 원두를 납품하게 된 것이다. 그의 끈기와 뚝심은, 진정 존경할 만했다.
"처음 시작할 땐 너무 막막하고, 가는 곳마다 거절당하며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한탄하다가 울기도 했어"
손사장님의 솔직한 말씀은 나를 위한 조언이었겠지만, 그때는 손사장님이 겪으셨던 절박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아직 시간이 있고, 더 준비해서 결국 잘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시기였지만, 사실 그때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 스페셜티 커피 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한 회사의 커핑(Cupping) 수업에 등록했는데, 커핑은 다양한 커피의 맛을 감별하는 훈련, 쉽게 말해 ‘좋은 커피 감별사’가 되는 과정이었다. 이 수업은 단순한 취미 강좌가 아니었다. 국제 커피 품질 대회인 ‘Cup of Excellence’의 심사 기준을 그대로 따르는 전문 교육이었고, 당시엔 국내에서도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높은 수업료가 부담됐지만, 이건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에 대해 배워야 할 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추출, 머신 사용, 로스팅까지—어느 하나 쉽게 넘길 수 있는 건 없었다. 하나씩 배워가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처럼 커피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걸. 2011년, 카페 창업은 그야말로 하나의 '붐'이었다.
커피라는 매혹적인 재료에, 상대적으로 낮은 진입 장벽이 더해지니 누구나 한 번쯤 "나도 한 번 해볼까?"를 떠올리던 시기였다. 트렌드를 타고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각종 커피 머신과 도구를 수입해 파는 이들도 점점 늘었다. 나 역시 커피에 빠져 있었지만, 카페를 열겠다는 꿈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기본기만큼은 제대로 알고 싶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커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페는 언뜻 보기엔 여유롭고 품격 있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여유라는 단어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직접 운영해보면 알게 된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고, 커피 한 잔에도 수많은 고민이 깃든다는 걸. 수익을 기대할수록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그런데도 그 시절, 커피 업계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마음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냥... 커피가 좋아서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고단함을 버티게 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커피는 여유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는 커피를 ‘사업’으로 바라봤다. 내가 가진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분야, 그게 바로 커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부가 깊어질수록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국 커피 시장엔 이미 내공 깊은 전문가들이 가득했고, 막 출발선에 선 나로선 그 벽이 너무 높게만 느껴졌다.
그 후로 많은 고민이 이어졌다.
한국 커피 시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남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서 카페를 운영하거나, 커피 관련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는 것이 현실적인 방향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과연 그렇게 시작한다면, 내가 대기업을 떠나면서 꿈꿨던 ‘진정한 자립’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건 단지 또 다른 형태의 의존은 아닐까? 그래, 혼동하지 말자.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커피’ 자체가 아니다. 커피는, 내가 자립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커피가 시작되는 땅으로 향했다.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내가 가장 익숙하고, 무언가 더 나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