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Central America)는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 벨리세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북쪽의 멕시코와 남쪽의 콜롬비아를 잇는 지리적 연결고리다. 경제적으로는 저개발 지역에 속하지만,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산 지대가 많아 커피 재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악지대에서 재배되는 커피는 품질이 뛰어난 경우가 많아, ‘마이크로랏(Micro Lot)’이라 불리는 소규모 고품질 커피가 활발히 생산된다. 이런 이유로 중미는 전 세계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 품질 높은 원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집중하고자 했던 나라는 과테말라, 니카라과, 그리고 코스타리카였다. 과테말라와 니카라과는 내가 살아본 곳이었고, 코스타리카는 ‘따라주(Tarrazu)’로 대표되는 커피 브랜드 이미지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중남미 각국에는 커피 산업을 대표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공식 기구들이 있다. 과테말라의 AnaCafe, 니카라과의 ACEN, 코스타리카의 ICafe가 그런 예다. 우선 이들과 접촉해 도움을 받아보려 했지만, 기대만큼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기는 어려웠다. 공식 기관 특성상 정보 제공은 제한적이었고, 대응 속도도 매우 느렸다.
보다 실질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다른 채널을 모색하던 중, 우연히 과테말라 농업수출진흥기관(Agexport)의 커피 수출 담당자 연락처를 얻게 되었다. 메일을 보내자 의외로 빠르고 호의적인 답장이 돌아왔고, 막연했던 기대감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지의 유명 농장이나 수출을 원하는 생산자가 있는지 묻자, 그는 오히려 내가 원하는 지역이나 등급을 알려주면 직접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후 과테말라 COE(Cup of Excellence) 수상 농장을 중심으로 리스트를 정리해 전달했고, 그는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중미 현지에서 어떤 사업을 만들어볼 수 있을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현지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중미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고, 과테말라에서 시작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로 이어지는 약 3주간의 출장 일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첫 출장지였던 과테말라에서는, 2003년 주재원 시절 인연을 맺었던 거래처 사장 Mr. Adrian 에게 연락을 취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조심스럽게 안부를 전했는데, 그는 의외로 흔쾌히 시간을 내주겠다고 했고, 오히려 자신도 커피 사업에 관심이 있다며 함께 농장 투어를 가자고 제안했다.
수년 만의 연락이었지만,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기대 이상으로 극진한 초대에 진심 어린 고마움이 느껴졌다.
사실 Mr. Adrian은 평소 매우 바쁜 사업가였지만, 출장 기간 중 무려 3일을 나를 위해 함께해 주었다. 첫날 아침, 그가 준비한 리무진 밴을 타고 우리는 Quetzaltenango(께찰떼낭고) 로 향했다. 새벽부터 출발해 4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곳은 사방이 푸른 초목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업 지대였다. 농장 주인이 직접 나와 우리를 맞이했고, 곧 농장 투어가 시작되었다.
커피 묘목부터 접목(Injerto) 방식까지, 커피가 자라는 과정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농장은 전반적으로 매우 체계적이고 잘 관리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좋은 커피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지를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농장을 둘러 본 후 농장주는 우리를 위해 식사까지 준비해 주었고,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알고 보니 이 방문은 Mr. Adrian의 회사 직원 중 한 명이 농장주와 오랜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한국에서 미리 연락했던 과테말라 농업수출진흥원(Agexport)을 방문했다. 담당자 마누엘(Manuel)은 예상보다 훨씬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한국에서 과테말라 커피를 알아보러 왔다는 소개만으로도 큰 관심을 보이며, 당일 방문 가능한 농장까지 미리 예약해두었단다. 그를 만난 건 분명 큰 행운이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과테말라시티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프라이하네스(Fraijanes) 지역의 농장이었다.
Fraijanes는 한국에는 낯선 이름이지만, 과테말라에서는 주요 커피 생산지 중 하나다. 화산 고지대를 중심으로 고도 높은 지형이 펼쳐져 있고, 수도 과테말라 시티와의 거리도 가까워 물류 접근성 면에서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커피 재배에 필요한 자연환경과 산업 인프라가 동시에 갖춰져 있어 잠재력 높은 산지로 볼수 있다.
우리가 방문한 농장의 농장주에게 커피 구매 방식에 대해 묻자, 올해 수확분은 이미 전량 판매되었고, 내년 물량 역시 수확 전부터 대부분 계약이 완료된다고 했다. 보통은 선물 거래 형태로 딜러들과 미리 계약을 맺는 것으로 보였다. 대형 농장 입장에서는 수확 후 개별 바이어들과의 협상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약간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판매 방식을 선호하는 듯했다.
일반적으로 소형 농장들의 경우, 수확한 커피를 직접 유통하기보다는 '베네피시오(Beneficio)'라 불리는 커피 가공 시설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베네피시오는 일종의 커피 처리시설로, 농가로부터 커피를 수매한 뒤, 가공·포장·보관 등의 후처리를 담당한다. 그렇게 정리된 커피는 이후 최종 바이어에게 전달되거나 수출 채널로 연결된다.
그렇게 Agexport의 Manuel 덕분에 Fraijanes 지역의 커피 농장과 처리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우에우에떼낭고(Huehuetenango)의 엘 인헤르또(El Injerto) 같은, COE(Cup of Excellence) 수상 커피를 배출한 유명 농장이었다. 하지만 과테말라 시티에서 차로 7~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게다가 먼 길을 감수하고 찾아간다 해도, 실제로 볼 수 있는 풍경이나 시스템은 Fraijanes에서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Fraijanes 방문을 마치고 과테말라 시티로 돌아오는 길, 시간을 내어 과테말라 공식 커피 협동조합인 AnaCafe를 찾았다. 과테말라 커피의 수출을 진흥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이곳은, 말 그대로 과테말라 커피 산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 외관부터 인상적이었고, 내부는 깔끔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였다. 유리로 된 커핑룸에서는 커피 테이스팅이 한창이었고, 다양한 커피 교육도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안내 자료 중에 한글로 된 정보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테말라 커피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 그렇게 많은 걸까? 아마도 현지에 꽤 많은 한인 인구가 있다는 점도 이유였을 것이다.
과테말라 출장 마지막 날, Mr. Adrian과 함께 안띠구아(Antigua)로 향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안띠구아 커피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었고, 개인적으로도 내가 과테말라에서 가장 좋아했던 도시라 설렘이 앞섰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안띠구아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마을 안의 한 카페를 방문했는데, 이곳은 소규모 커피 농가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Cooperativa)이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인상 깊었던 건, 이 카페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그중 한 미국인 매니저는 무려 8년째 안띠구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도움으로 한 영세 커피 농가를 직접 방문할 수 있었고, 농부의 삶과 커피 재배에 대한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안띠구아 커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안띠구아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들에게는 그 혜택이 거의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다른 지역의 커피가 이곳으로 들어와 ‘안띠구아 커피’란 이름으로 팔리는 경우도 많다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 농부의 입을 통해 듣고 나니 더 현실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왔다.
과테말라 출장을 마무리할 무렵, Mr. Adrian이 다음 목적지를 물었다. 니카라과에 갈 예정이라고 답하자, 그는 뜻밖에도 자신도 니카라과에 갈 계획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Mr. Adrian은 원래 니카라과 출신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는 니카라과에서 꽤 부유한 집안 출신 같았다. 미국에서 대학도 나왔고, 홍콩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으며, 과테말라에서는 오랫동안 현재 회사의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성공한 사업가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내 여정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사실 이번 과테말라 여행은 Mr. Adrian이 없었다면 시작부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내 일정 대부분을 함께해 주었고, 심지어 식사비까지도 흔쾌히 내주었다. 예전 주재원 시절 거래처 사장으로 만났을 땐,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파트너였고, 인간적인 유대까지 기대하긴 어려운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는 말 그대로 든든한 동행이자, 조용한 후원자였다.
Fraijanes 농장을 안내해준 Agexport의 Manuel 역시 잊을 수 없다. 단순한 공무적인 응대가 아니라, 진심 어린 협조와 배려로 내 방문을 도와주었다. 커피 농장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나에게, 그들의 도움은 단순한 안내를 넘어 하나의 배움이었고, 이 여행이 나에게 의미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