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회사를 퇴사하고 니카라과를 떠나며 다시는 이곳을 찾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관광으로나, 사업적으로도 니카라과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이 땅을 밟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돌아온 니카라과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공항에는 하루 먼저 도착한 Mr. Adrian이 나를 맞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서쪽의 마따갈빠 (Matagalpa) 지역으로 향했다. 내가 주재원으로 니카라과에 있던 시절에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마따갈빠는 해발 1,200미터에 자리잡고 있는 고지대로, 마나과에서 차로 3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그곳의 공기는 예상보다 선선했고, 마나과 처럼 더운 니카라과 환경에 익숙한 나로서는 낯선 느낌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숙소는 Selva Negra (검은 밀림) 라는 리조트였다. 이곳은 단순한 숙소를 넘어, 커피 농장과 가축 농장을 동시에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은 독일계 이민자 가문에 의해 세워졌으며,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리조트의 분위기는 상업적이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마따갈빠 근처의 히노떼가(Jinotega) 지역으로 이동했다. 히노떼가는 니카라과 중북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커피 생산 지역으로, 니카라과 전체 커피 생산량의 약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산지이다. 마을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의 여러 커피 농장을 둘러보았다. 그 중 한 농장은 규모가 작지만, Cup of Excellence(COE) 에서 상위 3위 안에 든 커피를 생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농장주는 COE 수상에 대해 특별한 자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COE 가 농가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정된 생산량을 가진 소규모 농가에게는 단기적인 주목 외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COE(Cup of Excellence). 스페셜티 커피 세계에서 이 이름은 일종의 상징처럼 통한다. 탁월한 품질, 국제 심사단의 공정한 평가, 경매를 통한 고가 낙찰. 이 모든 요소는 COE를 단순한 대회가 아닌, 커피 농가의 미래를 바꾸는 기회로 포장한다. 소비자에게는 ‘믿고 마시는 최고 커피’ 의 보증이 되고, 농가에게는 ‘경제적 자립’과 ‘성장’의 서사가 이어진다. 그렇게 홍보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수도 마나과로 돌아오는 길, 미리 미팅을 잡았던 커피 수출 회사 CISA를 방문했다. 리셉션에 방문자 등록 후 담당자를 만나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마침내 만난 후에도 그는 왠지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미팅은 성과 없이 끝났다. CISA는 미국과 일본 등지로 Commercial 급 커피를 수출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바이어나 마케팅에 대한 관심은 엿보이지 않았다.
니카라과에 온 지 이틀째, 내가 만난 커피 농장들과 커피 회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특히 ‘Direct Trade’와 같은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니카라과 커피 산업의 현재 상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니카라과의 커피 농장들이나 수출 회사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듯 했다.
과테말라에서 니카라과로 넘어오기 전, 방문할 곳들을 검색하며 준비하던 중 우연히 Facebook을 통해 Mr. Gonzalo 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의 프로필에는 커피 농부로서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는 “니카라과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니카라과 도착 이틀째,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연락을 해서 잠깐 미팅을 하는 정도로 생각했고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바로 Nueva Segovia 지역의 Dipilto 까지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마침 동행 중이던 Mr. Adrian도 과테말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었기에, 우리는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고맙게도, Mr. Adrian 은 내가 Dipilto 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차량을 준비해주었다. 수도 Managua 에서 Dipilto까지는 차로 6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Dipilto가 위치한 Nueva Segovia는 니카라과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온두라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가 알려준 위치에 도착했을때,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Mr. Gonzalo 가 집에서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그는 커피 농부이자, 니카라과의 최대 커피 수출 회사인 ECOM에서 15년 이상 커피 바이어로 일해온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ECOM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Mr. Gonzalo와의 만남은, 그동안 내가 느꼈던 니카라과 커피 산업의 소극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그가 가진 커피에 대한 열정과 깊이는, 니카라과 커피 산업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
그를 따라 집앞의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뒤에,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짐을 풀도록 해 주었다. Mr. Gonzalo 는 아들과 함께 그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의대에 다니는 아들의 방에서 내가 지낼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날밤 의대생 아들이 귀가했으나, 흔쾌히 "본인은 다른방을 쓰면 된다" 며 자기방을 정리해 주었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갑작스런 이방인의 등장에도 불구, 너무나 너그러운 호의에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Mr. Gonzalo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아침을 준비해주셨다. 내가 그토록 먹고 싶었던 Pinto (니카라과 전통 가정식 아침식사인 콩 볶음밥) 는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식사 후, Mr. Gonzalo는 나를 집 근처 여러 커피 농장으로 데려갔다. 함께 인사를 나눈 농장주들은 대부분 Mr. Gonzalo 와 같은 연배로 보였고, 모두 유쾌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해온 친구이자 동업자처럼 느껴졌다. 긴 세월 동안 커피 농사를 지으며 쌓아온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말투 속에는, 정직함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날 Mr. Gonzalo는 자신의 농장도 보여주었지만, 오히려 다른 농장들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지역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이후 우리는 근방의 한 커피 학교로 갔다. 여러 교실과 커피 기구, 머신을 갖춘 이곳에서는 농부, 바리스타 등 커피 관련 다양한 직업군을 위한 실용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곳의 교장 역시 Mr. Gonzalo 와 오래된 친구처럼 보였다. Dipilto 마을 사람들은 커피를 매개로, 오랜 시간 쌓인 우정과 신뢰가 그들의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Mr. Gonzalo는 단순한 커피 농부 그 이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니카라과 커피 업계에서 꽤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니카라과를 방문한 이후, 그의 Facebook에는 미국, 대만,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커피 바이어들이 다녀간 흔적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커피 박람회에서 니카라과 대표 부스로 참가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방문했을 즈음, 그 역시 니카라과 커피의 마케팅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그 구상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Nueva Segovia 에서의 일정을 마친 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집이 있는 Estelí 지역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수도 마나과로 향할 계획이라면 그 중간에 위치한 Estelí 에서 머무르며 근처 커피 농장들을 더 둘러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함께 Estelí로 이동한 우리는 마을을 지나 산 중턱에 자리한 한 커피 농장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Mr. Gonzalo 보다도 연배가 더 있어 보이는 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모두가 이미 현업에서 손을 뗀 듯 은퇴한 분들처럼 보였다.
이미 많은 커피 농장을 보고 온터라, 특별히 그분들과 커피 비지니스에 대해 문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연스레 Esteli 커피 농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대화를 이끌어 주었다. 너그러운 그들은 우리를 식사 자리에도 초대해주었고, 예상치 못한 따뜻한 점심 한 끼를 함께할 수 있었다. 모든게 자급 자족할 것만 같은 농장에서의 점심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니카라과에서의 출장 일정은 내게 있어 너무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겨우 Facebook을 통해 알게 된, 한 번도 전에 만난 적 없는 이방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시간을 내어 자신의 차로 커피 농장 곳곳을 안내해 준 Mr. Gonzalo의 성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깊고 따뜻했다.
나는 그저 감사했다. 그리고 그 호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이번 여행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 중미 커피에 대한 나의 진심이 그에게 전해졌던 걸까? 어쩌면, 그 마음이 어떤 경계를 넘어 닿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순간들이 그저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