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는 ‘중미의 스위스’라 불릴 만큼, 이 지역에서 가장 안전하고 자연 경관이 뛰어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과테말라와 니카라과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나 역시 꼭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막상 마땅한 기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이번 출장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원두 커피 납품 사업을 하시던 손 대표님이 문득 내게 이메일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코스타리카 PROCOMER의 중국 지사장이라던데, 한 번 연락해보게.”
손 대표님은 원두커피 유통을 하면서 회사 웹사이트를 운영했는데, 웹사이트에 있는 이메일로 코스타리카 커피의 한국내 판매에 대해 문의받은 적이 있었고, 그때 연락한 사람이 바로 그 지사장이었다. PROCOMER는 한국의 KOTRA와 유사한 기관으로, 코스타리카의 수출을 진흥하는 (준)공공기관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곧바로 답장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현재 코스타리카에 머물고 있으며, “이곳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 원하는 커피 농장만 알려주면 우리가 모두 가이드 하겠다” 고 답했다. 물론, 형식상 한 답이었을 수 있으나, 코스타리카에 특별히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의 답변을 믿어 보고자 했다.
니카라과에서 코스타리카까지의 비행 시간은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밤 늦게 코스타리카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이미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각. 피곤함이 몰려오던 참이라 호텔에 체크인하고 편하게 쉬어야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부터 뭔가 이상했다.
호텔 주변은 온통 술집이었다. 간판에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거리는 음악과 사람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처음엔 주말이라 그런가보다 했지만, 호텔 내부로 들어서자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로비는 어딘가 어두운 느낌이었고, 복도는 낡았으며, 방 안은 어쩐지 습기 찬 냄새가 감돌았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예약할 때는 ‘다운타운 중심가’ 라는 말에 예약했는데, 막상 와보니 이 중심가는 술집들의 중심가였고, 슬럼가에 가까웠다. 도심 한복판이었지만, 비즈니스와는 전혀 관련 없는 활기였다. 다행히 그 호텔은 1박만 예약해둔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곧바로 코스타리카에 거주 중인 대학 선배들에게 연락하여, 보다 편안한 호텔을 추천받아서, 바로 이동했다.
새로운 호텔 체크인 후 바로 PROCOMER 중국 지사장에게 연락하여 그가 알려준 주소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그를 찾으니, 바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한다. 그는 중국 지사장의 부하직원이었고, 오늘 하루 나를 도와 커피농장 방문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그의 차에 올라 우리가 향한 첫번째 목적지는 코스타리카 커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따라주 지역의 커피 농장이었다.
Tarrazu는 코스타리카 카르타고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고산지대에 위치한 커피 생산지다. 해발 고도와 기후 조건이 빚어낸 이 지역의 커피는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코스타리카 커피의 정수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머무르던 수도 산호세에서 차로 약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Coopedota, Tarrazu 를 대표하는 커피 처리 시설이었다.
Coopedota는 지역 내 수많은 중소 농가들이 수확한 커피를 모아, 후처리와 가공, 등급 분류와 포장을 한 뒤 최종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일종의 커피 허브 같은 곳이다. PROCOMER를 통해 미리 주선된 미팅 덕분에, 그곳의 General Manager를 직접 만날 수 있었고, 회사를 소개받으며 코스타리카 커피 산업의 구조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스타벅스를 비롯해 여러 글로벌 브랜드에서도 자주 방문한다는 이곳은, Tarrazu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커피 처리 시설이었다. 하지만 단지 ‘규모’에 머무르지 않고, 최근에는 소량 생산된 Micro Lot 커피를 선별해 마케팅하는 등 변화하는 시장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전통과 혁신이 동시에 공존하는 현장이었다.
이후 우리는 근처의 중소 규모 농장을 한 곳 방문했고, 이어서 코스타리카 커피 수출사인 Cafinter, 그리고 Exportador del Valle를 차례로 들러 간단한 상담을 나눴다. 각기 다른 위치, 다른 규모, 다른 운영 방식을 가진 이들 업체를 접하며, 나는 현지 커피 산업의 구조와 흐름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느꼈다.
PROCOMER 측 담당자는 원한다면 더 많은 농장과 회사들을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순간 나 스스로도 이미 어느 정도 선을 그었다는 것을 느꼈다. 새롭다는 감각이 희미해졌고, 집중력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더 많은 곳을 돌아보는 일이 이제는 단순한 반복처럼 여겨졌다. 정보는 충분했고,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이전만큼 들지 않았다. 커피라는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 안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다 떠올린 듯했다.
이쯤에서, 나는 문득 내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커피 사업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며칠간 중미를 누비며 마주한 농장들과 회사들, 그리고 그곳 사람들과의 대화는 예상보다 훨씬 실질적인 감각을 내게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생각보다, 커피를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일 자체는 그리 벽이 높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이 세 나라를 거치며 만난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커피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전문가였고, 무엇보다 태도 면에서 진지하고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었다. 각 지역의 커피 생산 환경과 시스템, 그리고 시장 흐름을 어느 정도 체감한 지금, Micro Lot이나 소형 농장의 커피들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품을 조금 더 팔고, 사람들을 더 만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작은 시장 안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커피 애호가들은 현지를 직접 방문해 생산자와의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담은 커피 한 잔에 자신의 스토리를 실어 전달하고 있다. ‘여정을 담은 커피’, ‘농부와의 연결’, ‘산지와 소비자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시장 안에서 꽤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특히 커피라는 세계는 하루아침에 결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이 분야엔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도 많고, 전문성과 깊이를 겸비한 이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오르기까지의 시간만큼, 나 역시 이 산업에 뿌리 내리려면 충분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내 스스로 이 일을 얼마나 오래, 진정성 있게 지속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단기적인 성과를 바라기보다는 장기적인 시선으로,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한다는 자각.
코스타리카에서의 마지막 며칠은 커피에서 살짝 벗어나, 조금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는 시간이었다. PROCOMER 담당자들과 함께 해산물 시장을 둘러보고, 이어 북부 지역인 우팔라(Upala)에 있는 파인애플 농장도 찾았다. 코스타리카는 세계 최대의 파인애플 수출국 중 하나이자, 품질 면에서도 손꼽히는 나라다. 그 명성이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우팔라는 니카라과 국경과 인접한 지역이다. 끝없이 이어진 파인애플 밭은 시야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었고, 강렬한 햇빛 아래 일하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파인애플 수확 노동자 다수가 니카라과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코스타리카에 비해 인건비가 절반 이하로 낮은 니카라과에서는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수입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온다.
한창 밭을 돌아보던 중, 품질 검사를 맡고 있던 한 직원이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검게 그을린 얼굴, 눈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그는 말했다.
"아마, 이런 품질의 파인애플 맛은 경험한 적 없을걸요?"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밭에서 파인애플 하나를 따내어 손질하더니, 껍질을 벗긴 조각을 건넸다.
받아든 파인애플 조각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그 맛은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달콤하면서도 짙은 산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단순히 ‘달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맛. 이국의 햇살과 토양,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이 응축된, 진짜 열대의 맛이었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PROCOMER 직원들은 여전히 내게 물었다.
"혹시 코스타리카에서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이미 그들은 여러 날 동안 하루 다섯 시간 넘는 운전을 감수했고, 수많은 회사와의 미팅을 일일이 주선하며 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주고 있었다. 그들의 호의는, 단순한 업무를 넘어선 진심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여행자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특정 산업에 대해 알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먼 나라를 찾은 개인. 그리고 그런 개인을 위해 한 나라의 무역진흥기관이 기꺼이 이만큼의 시간을 투자하는 일도, 분명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PROCOMER 중국 지사장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이번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예외와 우연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인연이 되었고, 배움으로 이어졌다. 만남 하나하나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고, 현장에서 들은 목소리들은 커피 산업의 복잡한 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었다.
생각할수록, 이번 코스타리카 여행은 행운으로 가득했다.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단순한 출장이나 산업 조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람과 산업, 나라와 사람이 어떻게 맞닿는지를 배울 수 있었던 여정이었다. 나의 작은 질문들에 진심으로 응답해준 사람들 덕분에, 이 여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