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체성의 완성
9월이다.
코스타리카 곳곳에는 국기가 걸리고, 9월 한 달은 ‘호국의 달(Mes de la Patria)’로 기념된다. 집집마다 국기로 장식을 하는 것을 보면, 애국심이 대단한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월 15일이 독립 기념일 (Dia de Independencia) 인데, 1821년 9월 15일, 과테말라시티에서 모여 있던 중앙아메리카 주(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념한다. 중남미의 독립 물결은 1811년 남미 파라과이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1816), 칠레(1818), 콜롬비아(1819)를 거쳐, 1821년 멕시코 독립으로 이어졌다. 1821년 당시 코스타리카는 과테말라를 수도로 하는 중앙아메리카 연합의 일부였고, 1838년 사실상 연합에서 분리하면서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중남미 사람들에게 독립이란?
한국사람에게 독립의 의미가 일제로부터의 독립, 민족의 정체성, 문화, 자유를 지켜낸 의미였다면, 중남미 사람들에게 독립은 사실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남미 사람들이 독립을 통해 얻고자 했던 목표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지만,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은 이미 스페인의 것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이후였다. 심지어 독립을 선두에서 이끈 많은 인물들도 당시 스페인 혈통의 끄리오요 (Criollo: 중남미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 로, 그들에게 스페인은 아버지의 나라였다. 즉, 한국 역사에 빗대자면, 일본에서 와 정착한 일본인 후손이 한국 땅에서 독립을 주장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과는 너무 다른 성격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유를 위한, 스페인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이 시발점이 되어 쟁취한 독립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1492년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500년대 초부터 1821년까지 300년 넘게 이어진 스페인 지배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정체성은 이미 상당히 스페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은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중남미인 (끄리오요, 메스티소, 인디헤나)의 나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끄리오요 (Criollo) : 스페인 백인 혈통이지만 중남미에서 태어난 백인
메스티소 (Mestizo) : 스페인 백인과 원주민 인디헤나 사이의 혼혈
인디헤나 (Indigena)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 시절 멕시코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멕시코 친구들에게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가 어떤지? 역사적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지? 등 질문을 하면, 질문의 의도가 뭔지? 잘 이해하지 못하던 멕시코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즉, 그들에게 스페인은 어떤 미움의 대상이거나, 역사적으로 풀어야할 숙제를 가진 대상이 아니었으니, 나의 질문은 우문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들의 9월 15일은 우리의 8월 15일 보다도 더 화려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물 풍긴다. 그리고, 결국 그 축제의 주인공은 유럽 백인의 후손인 끄리오요 또는 메스티소라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 정착했던 인디헤나의 정체성은 그 문화적 근간을 인정받기는 하지만, 중남미 사회에서 여전히 빈곤하고, 삶의 환경이 가장 취약한 집단이다. 그들의 시각에서 중남미의 독립은 당연히 자랑스럽고, 긍정적 역사로 기록되겠지만,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적어도 인디헤나 입장에서의 독립기념일은 기뻐할만한 날은 아닐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