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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롱님 Mar 27. 2020

8살, 코로나 입학생 #16 말아톤 육아 완주하기

D+22 2020년 3월 23일


#집밖음식의위로

벚꽃입학생도, 예비학부모도 봄방학 4주 차가 되니 지치기 시작했다. 몇 주간은 내가 요리사라도 된 듯 즐겁게 음식을 만들었다. #돌밥돌밥(돌아서면밥,돌아서면밥이라는 뜻)처럼 삼시세끼를 직접 차린다는 게 꽤 오랜 시간 워킹맘이었던 나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장을 보고 밥을 하고 아이와 먹고 치우고 그다음 밥을 준비하는 사이클이 생각보다 할만하다고 자부했는데 무너진 것이다.


나는 MSG가 가득한 식당밥이 그리웠다. 그중 불맛 나는 제육볶음이 가장 먹고 싶었다. 철판볶음밥과 부대찌개도 무척 생각났다.


학교 준비물 리스트가 e-알리미에 올라온 23일 오전, 우리는 신나는 마음으로 문방구와 다이소로 향했다. 신학기 문구류 쇼핑을 하고 나오는 길에 본도시락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주저 없이 가장 큰 도시락을 주문했다. 집에 와 둘이서 이 도시락을 싹싹 비워 먹었다. 얼마만의 집 밖 음식인지... 우린 내내 너무 맛있다고 말하며 먹었다. 며칠 뒤 나는 집 근처 부대찌개 집에서 테이크아웃 해와서 몇 그릇이나 먹었다. 진정 혜자스러운 맛이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건 바리스타가 정성스레 내려준 커피, 남이 말아준 김밥과 매콤한 떡볶이다. 내가 내린 커피, 내가 만 꼬마김밥, 내가 만든 꽁이용 떡볶이가 지겨워진다.




#우리동네 #산책루트

의사도 약사도 나에게 걸으라 말했다.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내 몸을 낫게 하려면 하루 30분씩 동네를 열심히 걸어야 한다고. 나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하지 못했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다리는 심하게 붓고 잠을 잘 때마다 팔다리가 저리고 아파왔다. 목과 등은 늘 돌덩이를 맨 것처럼 무겁고 아팠으며, 두통도 자주 왔다. 그런 상태로 커피를 달고 살았다. 커피가 내 손을 움직여 PPT와 Word 파일을 빼곡히 채워줬다.


지난해 여름 육아휴직을 시작하며 거의 십여 년 만에 요가를 등록했다. 워킹맘에게 운동은 사치라던 죄책감을 버리고 첫 요가 수업을 나갔을 때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자세들이 예전만 못했고, 선생님은 허리가 플랫 하다며(일자허리의 위험성을 알리며) 조심하라고 하셨다. 내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주던 그 요가도 두 달째 못 가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래서 요즘 꽁이와 함께 우리 동네 산책 루트를 발견해보자고 나선다. 익숙한 곳도 다시 가보고, 지나친 곳들도 찾아가 본다. '봄은 고양이로다' 시처럼 갸르릉 거리는 봄날의 고양이들을 만나니 매우 기분 좋은 오후이다.


아이와 산책을 그냥 다니면 재미없으니 테마를 정해 보았다.  연못가에 갈 땐 '사생대회' 놀이를 위해 스케치북과 코팅지, 연필과 색연필을 챙겼다. 아파트 건너 생태연못엔 산수유꽃, 매화꽃, 목련꽃 외에도 민들레꽃,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식물 세밀화를, 아이는 평소 사랑하는 연못을 그려본다. 꽃을 관찰하며 그리다 보니 매화꽃과 벚꽃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또 우린 배워간다. 엄마 눈엔 개구리가 안 보이는데 아이는 개구리가 있다며 가장 크게 그린다. 수련도 자라고 있으니 개구리 폴짝하는 모습도 곧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근 숲 공원 내 비밀스러운 모래 놀이터에 가보기로 했다. 뭐하고 놀까 생각하다 모래 속에 보물을 숨겨서 찾는 놀이를 만들었다. 홈콕키트 안의 알록달록 퍼니콘을 모래 속에 숨긴 뒤 시간 안에 찾는 게임이다. 큰 모래 삽을 두 개 챙겨 공원 숲길을 한참 걸어갔다. 퍼니콘 보물 찾기는 12:6으로 꽁이가 이겼다. 운이 좋게 돌아오는 길 개나리가 활짝 핀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했다.



이번엔 학교 가는 산책 루트이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도 연습할 겸, 학교 운동장에서 잠깐 놀다 올 겸 어떻게 학교를 걸어가면 좋을까 탐험해봤다. 근처 도넛 가게에서 도넛도 사고, 김밥집에서 김밥과 어묵을 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벚꽃입학까지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비 오는대로 동네를 재발견해 볼 예정이다.




#힐링이필요해

친구가 유명 오페라를 랜선 관람할 수 사이트를 보내줬다. 미국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오페라 공연이 취소되면서 덕분에 한국의 내가 온라인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주일 간 매일 한 공연씩 보여주는 데 나는 '일 트로바토레'와 '라 트라비아타'를 집에서 편하게 관람했다. 아이도 이 신기한 오페라를 집중해서 보았다. 누구 목소리가 더 예쁘냐고 연신 물으면서.



나른한 봄 오후를 깨우기 위해 신나는 음악 CD를 꺼내 튼다. Mika, Jamiroquai, Daish dance... 참 옛날 음악이다. 그런데 꽁이는 의외로 Santana를 가장 좋아한다. Santana의 foo foo가 나오면 우린 모두 춤을 춘다.


얼마 전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나갔다가 누군가가 잔뜩 내놓은 책더미 속에서 오래된 육아책들을 발견했다. 몇 권 꺼내와 읽고 있는데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모의 고민은 비슷하고, 해답도 유사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일본 교사가 쓴 책 중에서 찾은 말이 나에게도 희망이 된다.


“... 인생시계로 보면 아이들의 인생은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세인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아직 한밤 중인 2시 24분입니다. (....) 결국 아이들의 인생은 아직 새벽이 오기 전의 수면상태입니다.”


아이가 목욕하는 동안 매해 봄마다 꺼내 보는 피천득 님의 '수필'을 읽으며 기네스 한 캔을 마신다. 이번엔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라는 말씀이 가슴속에 꽂힌다. 이 봄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함께 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야~


남은 마라톤 코스도 힘을 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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