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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Oct 22. 2023

모든 시작은 다이아몬드 반지로부터

영국의 약혼 문화

한국의 결혼 준비는 매우 심플하다. 결혼하기에 충분히 오래된 커플 혹은 결혼 적령기가 된 커플들은 서로 자유롭게 결혼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이야기한다. '우리 결혼할래?' '응! 그래' 정도의 대화면 사실 충분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프러포즈'는 사실상 결혼 준비를 거의 다 끝내고 신랑이 신부를 위해 하는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 이벤트 정도이다. 요즘은 결혼 이야기 하기 전에 프러포즈부터 하는 커플들이 그래도 꽤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내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 결혼을 앞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까지 한국은 프러포즈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런데 영국은 정 반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모든 커플들의 '결혼'의 시작은 프러포즈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오래된 커플이어도 약혼을 하기 전에는 구체적인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는 편이고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이다. 구글에 검색해 보면, 어떻게 파트너와 결혼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냐는 질문들이 굉장히 많다. 한국에서는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말이다.



프러포즈와 다이아몬드 반지

영국을 포함한 서양 문화권의 여자들은 대부분은 프러포즈, 정확히는 다이아몬드 반지에 대한 큰 기대와 로망을 가지고 있다. 로맨틱한 여행지에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숨겨둔 다이아몬드 반지 박스를 꺼내 들고 "Will you marry me"라고 하는 그 장면. 그리고 손에 반지를 낀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Yes"를 외친다. 이렇듯 프러포즈를 받고 나서야 그들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약혼자 (Fiancee)'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리고 여자의 입틀막까지....

'약혼'의 개념이 이곳 커플들에겐 굉장히 중요해서 이와 관련한 콘텐츠, 관련 비즈니스가 굉장히 성행하고 경쟁도 치열하다. 그만큼 반지에 대한 니즈가 다양한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본인이 꿈꾸는 다이아몬드의 모양, 컬러, 디자인이 있고 연애를 하는 동안 상대방이 프러포즈하기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이곳 남자들은 파트너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반지와 함께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해야 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가장 놀랐던 점은 프러포즈 반지의 금액. 여기서는 '3 Month Salary Rule'이라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는데, 남자가 3개월치의 월급을 모아서 여자에게 줄 다이아몬드 반지를 산다는 것이다. 한 달에 400만 원을 버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면 1200만 원짜리 프러포즈 반지를 사는 게 국룰이라는 것. 요즘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는데 내 기준에는 여전히 헉소리 나는 금액이다. 결혼반지도 아니고 프러포즈 반지에 저 정도의 돈을 쓴다고? 나는 내 남자친구가 천만 원 넘는 반지로 프러포즈를 하면 등짝 스매싱부터 할 것 같다.


반지 금액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일부 사람들에겐 다이아몬드 반지의 크기가 평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사이즈 단위부터가 다른데 한국에서는 3부, 5부 등의 1캐럿 미만이 대중적이라면 여기는 보통은 1캐럿 이상이다. 그리고 요즘은 천연 다이아몬드 vs 랩 그로운(*실험실에서 만드는 인공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사이에도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랩 그로운이 천연 다이아몬드와 보기는 똑같은데 가격대는 훨씬 합리적이어서 요즘 정말 많이 크고 있는 시장인데, 그래서 천연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듣기론 친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기도 한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면에선 굉장히 여유로운 사람들이 왜 프러포즈 반지에는 이렇게 빡빡한 기준을 두나 싶다. 원래 보석에는 지식도, 관심도 전혀 없는 나에겐 정말 특이한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주도권은 남자에게?

약혼이 성사되어야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보니 결혼에서의 주도권은 사실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주로 남성)에게 있다. 게다가 프러포즈는 서프라이즈 이벤트이다 보니, 여자들은 청혼을 받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실제 예시가 있다. 남자친구와 8년을 만난 친구는 그와 어디 여행을 갈 때마다 프러포즈 여행이 아닐까 내심 기대를 했지만 늘 실망을 하곤 했다. 그래도 오래 만났는데 한번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속상해하면서 그러고 싶은데 괜히 부담을 주게 될까 봐 그러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4년 만난 남자친구가 있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애석하게도 그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니라 남자에게 달린 거잖아?'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여자 동료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꺼내서 한마디로 초를 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고 결국은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고 그들에게 '서프라이즈를 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국 커플들의 결혼, 프러포즈 이야기를 듣더니 굉장히 신박하고 효율적이라며 그게 훨씬 나은 것 같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하튼 기다리고 싶어하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는 갔지만, 결혼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하는 건데 프러포즈의 전통을 위해서 미래에 대해 자유롭게, 구체적으로 상의하지 못하고 모든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다는 사실이 왠지 나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프라이즈는 좋은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물론 나도 늘 프러포즈는 100% 서프라이즈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식 프러포즈처럼 이미 결혼 준비를 다 해놓고 형식적으로 하는 이벤트는 나에겐 진짜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평생 함께하고 싶은 파트너를 만나면, 결혼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가 나에게 먼저 정식으로 청혼을 해주길 바랐다.


난 이제 곧 만으로 서른세 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이미 결혼도 하고 아기를 낳아 가정을 꾸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혼에 대해 조바심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비혼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너무 늦지 않은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싶었다. 지금 영국인 남자친구와 만난 지 1년 반 정도 되고 최근엔 함께 살기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을 한다면 이 친구와 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은, 얘가 프러포즈를 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였다. 만약 결혼 시기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어떡하지? 나는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하는데. 프러포즈가 모든 것의 시작인 이곳의 문화를 최대한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남자가 먼저 주도권을 갖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다.



미안한데, 나는 지금 알아야겠어

그래서 어느 날은 남자친구에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운을 띄웠다. 한국식으로 '너 나한테 프러포즈 언제 할 거야?' 혹은 '우리 이제 슬슬 결혼하는 게 어때?'라고 하고 싶었으나 꾹 참고, '난 너와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데,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들에 대해 상의하는 게 어떨까?'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살짝 당황한 표정을 보이던 그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한참을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의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대화를 끝내고 나니 이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이게 '파트너'지!


주도권은 둘에게

사실 정답은 없다. 한국처럼 모든 것을 미리 상의하든, 영국처럼 상대방의 프러포즈를 기다리든 결국은 둘에게 최선의 방식을 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20대였다면 아마 굳이 저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근데 30대의 나는 가능하다면 1-2년 내에 결혼을 하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방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오픈했던 것이다. 결혼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분위기가 식어버릴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함께 가져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처럼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고 다른 가치관을 가진 커플들에겐,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양쪽이 행복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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