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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Feb 19. 2024

해외 취업은 개발자가 답일까?

문과라서 죄송한 사람이 영국에서 할 수 있는 일

본격적인 구직을 앞두고 고민이 많아졌다. 영국에서 새로운 일은 해야겠는데 한국에서 7년 동안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하자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우선 링크드인에 들어가 구직 공고들을 쭉 훑어보기로 했다. 런던에는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점점 옵션을 좁혀나가면 되겠다 싶었다.


디지털 노마드의 꿈

제조업이 강한 한국과는 다르게 영국은 서비스 산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런지 글로벌 기업의 본사/지사를 포함한 크고 작은 테크펌들, 마케팅 에이전시, 그리고 예술, 미디어나 콘텐츠 관련 직종들이 정말 많았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직무들도 많았다. 내가 영국에서 업계와 직무를 바꾸고자 한 이유 중에 자유로운 근무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궁극적으로는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디지털 노마드처럼 100% 원격 근무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나 유연 근무제처럼 한국에서는 쉽게 누릴 수 없었던 것들을 런던에서 만큼은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산업군보다는 디지털화된 산업이나 직무 쪽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동기부여를 위해 영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의 예시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높은 확률로 개발자나 데이터 애널리스트, 혹은 디자이너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부분 다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기술과 경험을 요구하는 전문직들이었다. 나는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대표 주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수학이나 과학과는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고 주입식 교육의 최대 수혜자로 입시에 필요한 수준의 지식만 익혀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이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분석', '꼼꼼함', '데이터'와 같은 단어들은 나에게는 늘 극복해야 할 산이었다. 예술, 디자인 쪽에 관심은 많았지만,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특출 난 재능이 있진 않았다.


영국에서의 개발자, 데이터 관련 직종, 디자이너 모두 연봉도 높고 원하면 언제든지 원격 근무가 가능한 직업들이다. 실력을 쌓아 프리랜서로 전향하게 되면 더욱 전망이 좋은 직업들이기도 하다. 실력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도 능력만 좋으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워낙 요즘 뜨는 유망한 직종들이다 보니 온라인 강의들도 많고 사설 기관에서는 일명 '부트 캠프'라 불리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3-4개월 정도 빡세게 수업을 듣고 나면 바로 취업이 가능한 수준의 레벨에 도달할 수 있고, 포트폴리오까지 만들 수 있어 꽤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선택하는 옵션이었다. 우선 맛보기라도 볼까 싶어 데이터 애널리스트 기초 수업을 들었다. 엑셀 함수와 유사한 간단한 코딩에 처음엔 '해볼 만하겠는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오만이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면서 일주일 만에 포기해야 했다. 나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새로운 배움에 열려있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딩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바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저런 부트 캠프들은 몇백만 원을 투자해야 했다. 내가 정말 예전부터 원했던 일이라든지, 나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그 정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나는 단지 영국에 취업을 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교집합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곳에서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취업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정답은 간단했다. 영국이라고 다를 것 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새로운 인사이트를 도출해 내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일이었다. MD였지만 늘 브랜딩과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기획해 내는 것,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상품을 기획하는 것에 가장 흥미를 느꼈고 또 내가 가장 잘했던 일이었다.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코딩'이 아니라 '기획'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아이디어를 기획해 내고 실현하는 일은 마케터나 프로젝트 매니저, 컨설턴트 정도로 좁혀질 수 있을 텐데 그들의 공통점은 그 나라 마켓이나 트렌드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이고 영국 시장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본인의 생각과 의견을 잘 전달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한 직무인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것이 핸디캡이 될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현지인과 나 사이에서 굳이 나를 뽑을 이유가 (아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점점 범위를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근무 환경을 보장하면서 나의 이상과 현실을 모두 반영할 수 있는 옵션이 뭘까? 어떻게 하면 내가 현지인들 보다 돋보일 수 있을까? 모든 경력을 리셋하고 신입으로 시작하기엔 잃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의 경력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선, 내가 가진 경력과 장점들을 써 내려가보기로 했다.

1. 7년의 패션 & 리테일 분야의 폭넓은 경험
2. 글로벌 브랜드들과 일한 이력이 있음
3. 엑셀에 능통함. 데이터 분석일을 쭉 해왔음
4. 인사이트 도출, 트렌드에 밝음
5. 데이터 시각화를 잘하고 기획안 프레젠테이션을 잘 만듦


이 모든 경우들의 교집합을 떠올려보니, 마케팅 중에서도 '디지털 마케팅' 쪽이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겠다 싶었다. 정통 브랜드 마케팅은 아무래도 경험과 직감, 감성이 더 중요한 일인데 디지털 마케팅은 데이터 기반의 의사 결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 꼭 시장에 대한 경험이 없더라도, 데이터를 읽을 줄 알고 유용한 인사이트를 제안할 수 있다면 그걸로 외국인이라는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경력을 갖고 있고, 제조업 기반의 브랜드 소속으로 상품을 기획한 경력까지 있으니, 기존의 마케터가 생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대기업, 외국계, 스타트업까지 거치며 일한 짬바가 있는데, 영국에서 경력을 새로 시작하더라도 누구보다 빨리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디지털 마케터는 내가 찾던 '교집합'이었다.


영국은 유럽에서도 이커머스와 디지털 마케팅 시장이 정말 커서 그만큼 직무도, 기회도 다양하다. 이미 수많은 글로벌 회사들의 본사와 지사가 런던에 있다. 영국 시장은 그만큼 글로벌 기업들에게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마켓이다. 여기서 새롭게 경력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나에게 펼쳐질 성장의 기회는 무궁무진 할 것 같았다.




유일하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영어였다.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 수준의 영어 실력이었지만, 회사에서 업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 부담 되고 자신이 없었다. 당장 인터뷰도 영어로 봐야 한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나에게는 '영어 자존감을 극복하는 것'이 또 하나의 큰 미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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