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마주한 첫번째 산
2월에 런던에 도착하고 나서 2주 정도 CV(영국/유럽 지역에서는 Resume가 아닌 CV라고 한다)와 링크드인 프로필을 열심히 가다듬었고, 3월부터 본격적인 구직을 시작했다. 영국에서의 구직은 나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일단 되는대로 돌진해 보고 결과에 따라 전략을 차차 수정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목표는 여름이 오기 전에 취직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물론 가장 우선순위는 디지털 마케팅 관련 직무였지만,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것이 브랜딩이기도 했기 때문에 '브랜드'와 관련된 직무도 혹시 모르니 지원해 보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링크드인을 통해 구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링크드인 위주로 공고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선 뭐가 먹힐지 나도 몰랐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곳은 일단 다 이력서를 넣었다. 헤드헌터를 통해서 지원을 하기도 하고 회사에 다이렉트로 지원하기도 했다.
2%의 확률
그렇게 3월 내내 이력서를 쉴 새 없이 넣었다. 큰 회사, 작은 회사, 영국 회사, 외국계 회사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이 오는 곳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보통은 이메일로 거절 레터를 받곤 했는데 '지원해 주셔서 감사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뻔하디 뻔한 자동 응답 이메일이었다. 몇몇의 헤드헌터들이 내 이력서를 보고 연락이 오긴 했는데 그들을 통해 지원을 해도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회사에 직접 지원 후에는 직접 하이어링 매니저(Hiring Manager : 실제로 채용을 주관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 다이렉트로 메시지를 보내며 간절함을 어필하기도 해 봤지만 답장을 보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내가 지금 마주한 현실인가 싶었다. 한국에서는 경력 좋은 잘 나가는 대기업 사원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냥 영국에 아무런 연고도, 경험도 없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3월만 200개 이상의 지원을 했고 4-5번 정도 연락이 왔으니, 확률로 따지면 2%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 2% 마저도 1-2년 차 주니어급을 찾는 경우이거나, 연봉이 너무 터무니없이 낮거나, 심지어는 웹사이트도 없는 어딘가 수상한 회사들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영국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확률이 낮을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는 보통 90% 이상의 확률로 면접까지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여기서는 면접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많은 이력서를 넣어본 적이 없는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니 점점 조바심이 났다. 사람 마음이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런던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즐기면서 하자고 다짐했었는데, 그 다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구직 시작 3주 만에 평정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아온 기회
3월 21일, 런던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종일 이력서를 넣다가 지쳐 잠이 들 때쯤,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서류에 합격했으니 다음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처음에 믿기지 않아서 메일을 다시 읽어보고 또 읽어봤다. 혹시나 해서 회사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미국에 본사를 둔, 임직원 수가 천 명이 훌쩍 넘는 글로벌 테크 기업이었다. 직무는 Brand Strategist (브랜드 전략가)로, 디지털 마케팅 쪽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국에서 쭉 해왔던 브랜드 전략을 구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는데 잠이 다 깰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영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드디어 나에게도 면접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1차 인터뷰는 인사팀과 하는 간단한 면접이었다. 영국에서는 1차 면접을 보통 인사팀과 먼저 하는데 하이어링 매니저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1차적으로 거르는 단계로 보면 된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지원 동기, 경력 등을 물어봤다. 한국에서는 늘 대면으로 인터뷰를 보다가 화상 인터뷰를 보니 생각보다 훨씬 편안하고 덜 긴장되었다.
2차, 3차, 그리고 4차 면접
며칠 뒤, 무사히 인사팀과의 1차 면접을 합격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4월 6일, 가장 중요한 하이어링 매니저와 2차 면접이 잡혔다. 하이어링 매니저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독일인이었다. 질문은 1차와 유사했는데 좀 더 나의 경력에 집중한 질문들이 많았다. 그녀는 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자기가 독일에 살고 있으니 내가 입사하게 되면 부담 갖지 않고 재택근무를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면접 마지막에 그동안 해왔던 일을 정리한 포트폴리오까지 보여주니 굉장히 좋아하며 자기 팀원들과 공유 하고 싶다며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내가 입사하게 되면 나의 매니저가 될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인터뷰 내내 굉장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계속 '네가 입사하게 되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느낌이었다. 매니저가 독일에 사니 직접 부딪힐 일도 없고, 내가 쭉 해왔던 업무에 자유로운 재택근무까지 보장된다니! 이건 모든 직장인의 꿈이었다.
인사팀에서 그날 바로 메일이 왔다.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미국 본사에서 같은 직무로 일하는 사람과 SVP(Senior Vice President)와의 3차, 4차 면접이라고 했다. 이쯤 되니 도대체 몇 차까지 인터뷰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과 모두 같은 날에 면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의 이직은 보통 2번 정도의 면접만 보면 됐었는데, 벌써 4차라니... 대기업 신입 공채를 다시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4월 12일에 두 사람과의 인터뷰까지 끝냈다. 두 사람 모두 다 나에게 긍정적이었다. 면접을 보면 볼수록 이 회사에 붙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졌다. 이번이 마지막 면접이었으면 했다.
진짜 최최최종.pdf
이틀 뒤, 3차와 4차 면접까지 모든 팀원들의 "really positive" 피드백을 받았다는 메일과 함께 파이널 라운드 면접을 보겠다는 연락이 왔다. 아,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파이널 라운드는 프레젠테이션이었는데, 회사가 현재 함께 일하는 브랜드의 예시를 주고 그 브랜드를 위한 실제 전략을 세우는 일이었다. 4차가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운이 쭉 빠졌지만 그래도 최종 5차 과제는 내가 지난 7년간 늘 해왔던 일이어서 솔직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브랜딩 프레젠테이션만큼은 한국에서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 있었다.
준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해서 4월 26일로 일정을 잡았다. 나는 그날부터 미친 듯이 과제에만 몰두했다. 3월 21일에 첫 서류 합격 메일을 받았는데 최종 면접을 4월 말에 보게 되었으니, 무려 한 달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그동안 다른 곳에 지원도 하지 않고 이 회사에만 완전히 올인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 이 산만 넘으면 드디어 최종 합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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