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세시 Mar 18. 2024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런던에서 맞닥뜨린 두 번째 바닥

그렇게 런던에 온 지 3개월 만에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런던에는 여름이 찾아왔고 날씨는 얄미우리만큼 매일 좋았다. 런던의 여름을 즐길 새도 없이, 최종 탈락의 소식을 듣자마자 같이 살던 친구 집에서 나와서 당장 들어갈 수 있는 방을 부랴부랴 구했고 5월 20일, 그 주 일요일에 바로 입주를 결정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런던 물가

여자 3명과 함께 주방과 화장실을 셰어 하는 플랏이었는데 월세는 950파운드였다(한화 160만 원). 더블 침대에 책상, 큰 옷장 하나가 단출하게 있는 방이었다. 이제 외식이나 문화생활은 꿈도 못 꾼다고 생각했을 때, 생활비는 600파운드(한화 100만 원) 정도 선에서 해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해야만 했다. 한 달에 숨만 쉬어도 300만 원은 우습게 드는 도시에서 다시 '두 번째 바닥'을 맞이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말이 이렇게나 와닿았던 적이 있었을까? 이 비싼 도시에서 또 기약 없는 취준 생활을 해야 하다니. 잔인하게도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통장 잔고는 앞으로 3개월이면 똑 떨어진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매일 나 자신을 세뇌시켰다. "정신 차리자,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이사하는 날도 역시나 날씨가 좋았다. 방 한칸에 저 월세는 너무했어


헝그리 정신이 필요해

한국에서는 거의 밖에서 사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었는데, 이사하고 나서는 어떻게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삼시 세끼를 모두 요리하기 시작했다. 커피는 대용량으로 내려먹을 수 있는 필터 커피로 대체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에도 여러 옵션을 비교해 보고 더 싼 것을 구매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아본 적 없었는데... 지난 3개월간 '이왕 하는 거 즐기면서 하자'라는 유혹에 속아 넘어간 내가 원망스러웠다.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헝그리 정신'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력서를 여기저기 뿌리기 시작했다. '뿌렸다'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그냥 직무/업계 가리지 않고 공고가 보이는 족족 이력서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몰라서 더 막막했다. 긍정적으로 하루를 시작하자는 아침의 다짐은 해가 지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 매일매일 자존감이 떨어지는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나보다 몇 년 전에 스웨덴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서 디지털 마케터로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같이 살던 친구에게 소개받은 친군데, 워낙 겪어온 상황이 비슷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고 그 친구가 도움이 되는 여러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원래 나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그 친구와 통화하는 그날만큼은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심스럽게 이력서를 좀 봐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쭉 듣던 친구는, 전략을 아무래도 싹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새로운 전략, 다시 또 시작

'언니, 일단 이력서에 말이 너무 많아'로 시작한 그녀의 피드백. 그렇다. 내 이력서는 사실 내가 봐도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글자가 빽빽했다. 한국에서 이직을 워낙 많이 한 데다 어떻게든 내가 한 일 들을 종이 한 장에 모두 어필하려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어차피 커리어를 바꿀 예정이니, 굳이 한국에서 해왔던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며 좀 더 콤팩트하게 수정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조언은, 지원하고자 직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좁히자는 것이었다. 최종 탈락 후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되는 대로 아무 데나 다 지원해 왔는데, 그러지 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디지털 마케팅' 직무에 그동안 해왔던 경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곳에 지원해서 합격률을 높이는 방향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작은 회사는 오히려 가능성이 낮다며 오히려 더 큰 규모의 글로벌 기업에 적극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회사의 규모가 클수록 '다양성(Diversity)'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곳이 많아서 외국인의 비중이 높고, 그러다 보니 외국인을 채용하는 데 익숙하고 기회가 많이 열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직전 최종 면접까지 갔던 회사도 규모가 꽤 큰 테크펌이었다. 친구는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나의 가치를 낮추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누가 봐도 우수하고 좋은 경력이고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며, 언젠가는 나의 가치를 100% 인정해 주는 회사가 나타날 거라고 했다. 실제로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나와 비슷한 마음고생을 하고, 결국은 지금 내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해주니 안도감이 들었다. 그간 스트레스로 늘 잠을 설쳤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잠을 잘 잤다. 마치 게임에서처럼 나에게 다시 '하트'가 주어진 느낌이었다.


심기일전한 런던의 여름

6월이 되었다. 친구의 조언을 반영해서 새로운 이력서를 만들었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계속 떠올렸다. "그래. 돈이 떨어지면 알바라도 하지 뭐! 뭐 굶어 죽기야 하겠어?"라며,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가며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이력서가 마치 부적인 것 마냥 나에게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그 무렵, 지루하게 반복되던 나의 삶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동생이 6월 22일부터 2주 정도 영국으로 놀러 오기로 한 것이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내가 보란 듯이 그전에 취직하고, 정식으로 입사하기 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동생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하필 유럽에서 가장 비싸다는 스위스에서 3박을 보내기로 했다. 비록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너무나도 컸지만, 그래도 멀리서 동생이 나를 보러 영국에까지 오기로 했고 나 역시 그간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이 기회에 잠시 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로 했다. 돈은 뭐... 최대한 동생이 오기 전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생각이었다.


6월 20일 오후 2시, 동생을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던 중, 평소 조용하던 내 메일함에 뜻밖의 메일이 도착했다.




<이전글>

https://brunch.co.kr/@3intheafternoon/57

매주 월요일 연재를 합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