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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Mar 25. 2024

머피와 샐리의 법칙

스위스 여행하며 면접 준비를 하게 될 줄이야

서류에 합격했으니 1차 면접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와, 이게 얼마만의 서류 합격 인지. 이력서 전면 수정을 포함해 새로운 전략을 도입한 지 3주 만이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디지털 마케팅 직무에만 집중해서 지원을 했는데, 메일이 온 곳은 심지어 그중에 꼭 입사하고 싶은 회사 중에 하나였다. 이틀 뒤에 동생이 런던으로 놀러 오면 마음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취업 생각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동안 그렇게 기다렸던 메일인데, 하필 동생이 런던으로 놀러 오기로 한 날 직전에 소식을 듣다니.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게 말로만 듣던 머피의 법칙인가?


 네? 바로 2차 면접이요?

동생은 수요일에 런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월요일에 메일을 받았는데 다행히 내가 가능한 시간에 직접 면접을 예약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 가장 빠른 날짜인 그다음 날 화요일로 면접을 잡을 수 있었다. 인사팀과 함께하는 1차 면접 정도야 그동안 준비를 하도 많이 해서 자신 있었다. 1차 면접을 보게 되면, 보통 그다음 전형 안내까지 평균 3-5일은 걸리니 우선 동생이 오기 전에 부랴부랴 1차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요일 오후 3시에 줌으로 간단하게 30분 동안 면접을 봤다. 분위기는 꽤 좋았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해왔던 일들, 그리고 영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독특한 이력이 굉장히 인상적이라던 그는 갑자기 면접이 끝날 무렵에 혹시 하이어링(Hiring) 매니저와 이번주에 당장 2차 면접을 바로 볼 수 있겠냐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 자리에서 합격 통보와 함께 2차 면접 안내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하이어링 매니저는 나의 상사가 될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과의 면접은 이후 당락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인사팀과 가볍게 치르는 1차보다는, 2차에서는 보통 실무에 대한 질문이 꽤 깊게 들어가기 때문에 직무나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빠삭해야 했다. 그래서 디지털 마케팅의 모든 것이 처음인 나에게는 더더욱 사전 공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동생 도착 후의 스케줄을 보니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동생이 여기까지 왔는데 하루 종일 면접 준비에 시간을 투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다음 주 스위스로 3박 4일 놀러 가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주로 미루게 되면 스위스에 있는 동안 부담감에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도 못할 것이 뻔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한가했는데... 왜 하필 지금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그냥 눈 딱 감고 이번주에 볼 건지, 그래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스위스에 다녀와서 면접을 볼 건지 결정해야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그렇게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문득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면접을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생과 여행을 떠나자. 그렇게 동생이 오는 날 수요일 아침에, 금요일에 면접을 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다.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날 저녁에 공항으로 동생을 마중 나가기 전 최대한 업계와 회사, 직무에 대한 공부를 하고, 동생이 잠든 이후에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이번 구직 전략 수정에 굉장히 큰 도움을 준 스웨덴 친구가 마침 디지털 마케팅 안에서도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 친구에게 또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구는 기꺼이 '속성 강의'를 해주었고 그 덕에 업계에 대한 기본 지식을 벼락치기로 쌓을 수 있었다. 면접 전날 목요일, 하루를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시차적응을 실패한 동생 덕에(?) 생각보다 일찍 귀가해서 그날 저녁부터 새벽까지 막판 스퍼트를 낼 수 있었다.


금요일 아침 9시, 대망의 하이어링 매니저를 만났다. 내가 살고 있던 플랏에 조그만 사무실 겸 창고가 있어서 거기 들어가서 면접을 봤다. 그녀의 첫인상은 조금 차가웠는데, 화상 면접이었는데도 그게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영국 사람들은 보통 간단하게 스몰 톡을 먼저 하고 시작하게 마련인데, 처음에 간단히 소개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질문 폭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한 질문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이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모르더라도 최대한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당황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굉장히 당황한 나를 보더니 그제야 웃으면서 긴장한 것 같은데 릴랙스 좀 하라고 했다. (어떻게 릴랙스 해요....) 이미 너무 긴장을 해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어째 저째 면접은 잘 끝냈지만, 도통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면접을 망친 것 같았다. 끝나고도 멍하니 책상에 10분을 앉아있었다. 기가 확 빨린 느낌이었다. 내가 면접을 보는 동안 동생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면접 시간이 끝나고도 방으로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는지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 아무래도 떨어진 것 같아'


두 번째 머피의 법칙  

최선을 다한 상황에서는 후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끝난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현재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월요일이 되었고 간만의 유럽 여행이라 굉장히 들뜬 마음으로 스위스에 도착했다. 우리 자매가 함께하는 이 순간 자체가 행복했다. 특별한 계획이랄 것은 없고 스위스의 자연을 원 없이 즐기는 일정이었다. 여행 첫날, 둘이서 숙소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이제 다음 날 여행 계획을 세우려던 찰나,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월요일 저녁, 너무나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라 핸드폰을 바라보며 메일을 읽으면서도 한참을 멍 때렸다.

월요일 저녁 8시에 도착한 2차 면접 합격 이메일 + 3차 면접 안내


2차 면접 합격 메일이었다. 우선, 'The Feedback was very positive. (피드백은 굉장히 긍정적이었습니다.)'를 읽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때 너무 긴장을 하기도 했고 몇 가지 대답을 시원찮게 못해서 당연히 면접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하이어링 매니저는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기쁨도 잠시, 3차 면접은 또 과제를 주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프레젠테이션 과제였다. 최종 프레젠테이션 면접에서 떨어진 충격에서 아직 완벽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또 다른 과제를 받다니. 그것도 스위스 여행 첫날에 말이다. 동생이랑 메일을 같이 확인하며 좋아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같이 웃었다. 이건 누군가가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래도 어쨌든 합격이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


확실히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한 면접이라 일정은 10일 뒤인 그다음 주 목요일로 잡았다. 동생이 그 주 월요일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시간만큼은 동생과 함께 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동생은 사실 나의 행운의 부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과제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좀 더 데이터 분석과 관련한 과제였다. 주어진 로데이터 (Raw data)를 우선 분석한 뒤에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것이다. 나와 내 동생은 둘 다 상품 기획 엠디 출신인데, 동생은 나보다 훨씬 숫자나 데이터 분석에 능통했다. 동생은 스위스 여행하는 틈틈이 내 과제를 도와주었다. 같이 데이터를 보며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짚어주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도 생각보다 빨리 전체적인 큰 그림을 먼저 구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동생과 함께 스위스에 여행하는 동안 무려 3번의 전화를 받았다. 모두 인사팀이나 리크루터에게 온, 다음 인터뷰 전형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전화였다. 동생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손에 쥔 카드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스위스에서 런던으로 다시 돌아갈 때엔 희망의 불씨가 벌써 4개나 더 생긴 것이다.


그때 모든 상황을 배려해 준 동생에게 아직도 고맙다. 동생은 나에게 늘 큰 힘이 되는 소중한 존재였는데, 그래서 동생과 이곳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사실은 나에게 찾아온 행운의 부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머피와 샐리의 법칙

'샐리의 법칙'은 '머피의 법칙'의 정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연히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수월하게 잘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모처럼 동생과 함께하는 여행에 면접이 우르르 잡혀서 처음엔 이게 웬 머피의 법칙인가 했는데 돌이켜보니 머피의 법칙이 아니라 '샐리의 법칙'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침 동생이 도와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고 구직하는 동안 적극적으로 도와준 스웨덴 친구가 또 하필 같은 업계인 것도 말이다. 물론 여행하랴, 면접 준비하랴 때로는 잠을 못 자기도 하고 늘 피곤하기는 했지만, 우연히도 일어난 일들이 그동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들이었다.


월요일, 동생을 한국으로 보내고 그 후 이틀 동안 모든 시간을 3차 면접 준비에 쏟아부었다. 면접 전날이었던 수요일은 결국 밤을 꼬박 새야 했지만, 당일에는 큰 실수 없이 무사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잘 끝냈다. 지난번 회사가 최종 면접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한달 가까이 잠수 탄 경험 덕분에 이번에는 결과 안내 일정에 대한 피드백까지 받았고, 절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교훈을 배워서 다른 회사 면접에도 최선을 다했고 다른 직무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여정 끝에 마지막에는 나도 영화 속의 샐리가 되어 웃을 수 있겠지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한 통의 메일로 나의 '바닥부터 시작한 런던 구직' 이야기에 또 다른 큰 터닝 포인트가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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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3intheafternoon/58

매주 월요일 연재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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