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인생의 전환점을 위해서
영국에 가는 것은 나에겐 현실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건 옵션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결국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민이었던 것이다.
해외 이민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유학으로 시작해 정착하는 방법, 현지인 파트너를 만나 함께 이주하는 방법, 현지에서 우대하는 직업을 선택해 비자를 받는 법,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는 투자 이민까지. 안타깝게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그중에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옵션이 '유학 후 정착'일 텐데 나는 당장 수천만 원의 학비와 생활비를 부담할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았다. 영국의 석사 학위는 1년이라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보다는 짧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투자와 회수만 따졌을 때 유학은 나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나중에 해외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관심도 없는 MBA나 경영학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한다면 내가 진심으로 배움의 열정이 있는 분야에 투자하고 싶었다. 저축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에겐 당장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은 회사를 관두게 되면 나올 퇴직금과 집을 빼게 된다면 받을 보증금뿐이었다.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안하면 겨우 6개월 정도만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 대신 당장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옵션은 학비처럼 큰 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바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였는데 그게 가능한 비자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뿐이었다.
우선 이민을 위해서는 최소한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비자를 받아야 하고 영주권을 위해서는 그 합법적인 신분을 일정 기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영국만 해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영주권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궁극적으로 내가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가서 영주권 고려 대상이 되는 비자로 전환해야 했는데, 나의 경우엔 회사에서 스폰해 주는 '취업 비자'였다. 대부분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외국인에게 비자를 스폰해 주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현지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여러모로 기회가 있었다.
2년의 증명 기간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통상 유효기간이 1년이다. 입국을 하게 되면 최소 3-4개월 정도의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고 운 좋게 취업을 하게 된다고 해도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해결하기엔 다소 촉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국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유효기간이 2년이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만약 운 좋게 취업에 성공한다면 남은 기간 동안 내 능력과 실력을 증명해서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좀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 입장에서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담 없이 채용해서 일을 시켜볼 수 있으니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 영국이 아닌 타 국가에서도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워홀 비자에서 취업 비자로 바꾼 분들도 찾아보면 굉장히 많아요. 나라의 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관심 있는 국가의 이민법을 꼭 따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브렉시트 이후 비(非) 유럽인의 지위
내가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만 해도 비 유럽인 사람들이 영국에 정착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영국인을 제외하고 EU 소속 국가 출신인 유럽인들도 영국에서 비자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으니, 비 유럽인 사람들이 옵션에서 제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브렉시트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제 영국은 더 이상 EU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유럽인들도 영국에 일하거나 살기 위해서는 똑같이 비자가 필요하다. 채용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유럽인이나 비 유럽인이나 모두 비자 스폰이 필요한 외국인이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더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유럽인 vs 비유럽인 이었다면 지금은 영국인 vs 비영국인이 된 것이다. 브렉시트는 영국사람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지만 취업 관점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비 유럽인에게는 어쩌면 기회이다.
(* 최근엔 영국 정부가 굉장히 폐쇄적인 이민법을 발표했습니다. 브렉시트 이후 '외국인'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자국민 보호법도 강화되는 추세이니 꼭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전 글 링크 걸어둡니다.)
https://brunch.co.kr/@3intheafternoon/43
서른 살 마지막 영국행 티켓
2021년 7월, 영국 워킹 홀리데이의 하반기 모집이 발표되었다. 영국 워홀은 상반기에는 1,000명을 선발하지만 하반기 정원은 그의 1/5 수준인 200명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무작위 추첨 정원 200명에 내 운명을 걸었다. 지금은 35세까지 나이 상한선이 높아졌지만, 당시 나는 이미 만 30세였고 합격 발표일 기준으로 나이 기준을 충족해야 했기 때문에 2021년 하반기가 진짜 마지막 영국행 티켓이었다. (나는 1월생이라 그다음 해 1월 상반기 모집 시점엔 만 31세가 되어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자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되어도 그만 안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붙고 나니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그렇게 꿈꾸던 영국에 진짜 '살러' 가게 되다니. 친한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부모님께도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드리고 싶어 그 주말에 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른에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크게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차분하게 내 결정을 받아들이신 부모님.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드리니 "그래. 늘 그래왔듯이 알아서 잘하겠지" 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출근하자마자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가게 되어 퇴사를 하겠다고 팀장님께 이야기했다. 브랜드 론칭의 동고동락을 처음부터 함께해 온 팀원들이라 아쉬움이 컸지만 고맙게도 모두 나의 선택에 멋지다고 응원해 주어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물론 모두가 나의 영국행에 박수를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영국에 이민을 간다 하니 그게 가능하긴 하냐며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국에서 유학한 지인들은 영국 비자 발급의 까다로움을 잘 알고 있어서 나의 결정을 말리거나 비자 취득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다른 나라들을 추천해주곤 했다. 특히 내가 멘토로 생각했던 전 회사 대표님까지 사실상 반대표를 던지셨다. 주변의 예시를 들려주시며, 현지에서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려워서 국내로 다시 돌아오는데 나처럼 국내 대학 출신에 한국에서만 경력을 쌓은 사람이 영국에 취업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냐고 하셨다. 이미 한국에서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냐고. 사실 모두가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진심 어린 우려와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물론 전혀 걱정이 안 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까지 나 스스로를 위해 했던 선택들, 그로 인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금까지 온 내 모습을 돌이켜 보니 어디 가서든, 어떤 일이든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마치 청춘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처럼, '두고 봐! 보란 듯이 잘 해낼 테니까'라고 다짐했다.
출국 당일, 가족들이 공항까지 배웅을 와줬고 마지막 출국장에 들어가는 길에 엄마와 동생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빠는 옆에서 어색한듯이 허허 웃으시며 떠나는 사람 불편하게 왜 그러냐 하셨다. 그렇게 다 같이 포옹을 하고선 엉엉 울었다. 그제야 나도 실감이 났다. 이번에 가면 정말 언제 올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런던으로 향하는 편도 티켓을 손에 꼭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 뒤면 펼쳐질 전혀 다른 세상,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 대신에 나는 그저, 나를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