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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Jan 29. 2024

한국을 떠난 것은 단순히 로망이 아니었다.

영국행을 선택한 진짜 이유

영국에 와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중에 하나는 '왜 한국을 떠나서 영국으로 왔냐'는 것이었다. 나에겐 늘 두 가지 버전의 대답이 있다. 첫 번째는, 누구에게나 써먹을 수 있는 '아주 오래전부터 영국을 좋아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와 꽤 친해지면 알게 되는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모범생 K장녀

나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사춘기 한 번 없이 자란 착하디 착한 K장녀의 표본이었다. 그 당시 내 또래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모두의 미션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 주어진 첫 미션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부산이 작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늘 서울을 동경했다. 사실 공부에 크게 흥미가 없어서 고등학교 2학년 까지도 성적은 늘 중위권이었는데 문득 생각해 보니 서울에 가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했고 더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서 재수까지 했다. 그때 오른 성적은 이후 몇 년 간 학교 선생님들의 무용담에 늘 등장할 정도로 기적 같은 성과였다.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그렇게 명확한 목적이 있으면 그걸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스타일이었다. 대학 진학 다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좋은 회사에 취업하기'였다. 대학에 가서도 꽤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정해진 가이드라인 대로 2-3학년때는 해외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 대외활동을 했다. 4학년 2학기에는 토익, 오픽 등 취업에 필요하다는 자격증을 땄다. 휴학 한번 하지 않고 4년 칼졸업을 했고 졸업도 전에 대기업에 합격했다. 그렇게 두 번째 미션까지 성공한 나는 우리 집안, 우리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최종 퀘스트 문턱에서

이제 대기업에 일하는 직장인이 되었고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주변에서는 나의 다음 미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축해서 집사기' 혹은 '결혼하기' 정도로 좁혀졌다. 그런데 직장 생활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려가지 않았다. 사회에 한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내 인생은 해피엔딩 동화가 아닌 한 치 앞도 모르는 드라마가 되었다. 사회에서 정답이라고 말하는 목표를 위해 달려오던 내가, 인생에 처음 겪는 장애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내가 게임의 퀘스트를 깨듯 이뤄내가고 있는 것들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일과 삶에 대한 가치관

20대 때는 일과 나를 동일시했었다. 내가 열정적으로 일하면 그만큼 내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나에게 일은 단지 내가 행복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독서나 글쓰기, 운동 등 회사 보다 회사 밖의 삶이 나에게 더 큰 성취감과 행복을 주었다. 그래서 나에겐 '일'과 '삶'의 발란스가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적어도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업계에서는 일이 삶을 침범하는 일이 꽤나 자주 있었다. 한국에서는 소위 말하는 '갓생'을 살지 않으면 삶에 열정이 없다거나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나는 갓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나는 내가 행복했으면 했다.


결혼과 파트너십

나에게 '결혼'은 특히 여성에게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시절에서는 벗어났지만, 성별을 떠나 모든 이에게 평등이 주어진 지금에도 결혼이라는 제도 내에서는 여전히 여성에게 전통적인 역할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남아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상적인 여성상은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업과 연봉을 가진 커리어 우먼이면서, 가정을 잘 돌보고 아이까지 낳아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동등한 '파트너십'인데 한국에서는 종종 그 역할과 의무가 무의식적으로 여성에게만 엄격하게 요구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요구에 고분고분 따를 자신이 없었다.


스물아홉에 3년을 만난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다. 주변 친구들은 다 제 짝을 만나서 결혼을 하는 시기에 나는 솔로가 된 것이다. 조급한 마음은 딱히 없었지만, 사실 걱정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까다로워진 '이상적인 파트너'에 대한 나의 기준 때문이었다. 친구들에게 내가 적은 리스트를 보여주면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며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가 될지언정,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을 만나며 나름대로 노력을 해보았다. 이상형이 뭐냐는 질문에는 '젠더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라 늘 얘기했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이며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젠더 갭을 줄이는 데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 보통 반응은 두 부류로 나뉜다. 내가 '페미'라며 기겁하는 사람과 자신이 얼마나 평등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임을 어필하는 사람들이다. 후자의 경우도 조금만 더 깊은 대화를 해보면 그들의 지식이 결국에는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한국에서 나의 이상적인 파트너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물론 나와 가치관을 완벽히 공유하는 사람이 한국의 어딘가에는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1%의 확률에 기대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높은 확률에 기대를 해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었다.


정답이 없는 세상

나는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을 따라가려고 애썼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얻었던 이득도 물론 많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넘겨버렸던 기회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아무 미션도 기대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하다.


나중에 한국에서 결혼하고 엄마가 되어서, 내 아이에게 ‘네가 원하는 대로,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상상해 봤다. 하지만 주변에서 모두 정형화된 비슷한 길을 걷는 것을 보게 되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 자신이 불안해질 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받는 환경에서 살기를 바랐다. 다수와 다른 선택을 해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말이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한국의 직장 문화를 포함해서 워라벨, 결혼 등 많은 요소들이 영국행을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이 되어 주었다. 20대였다면 마냥 '해외생활'과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로망으로 한국을 떠났을 것 같은데 30대가 되고 나서, 한국을 떠나 영국으로 가기로 한 결정은 철저히 현실적인 이유에 기반한 선택이자 내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뒤로 하고 영국으로 떠나는 것이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워킹 홀리데이를 지원하게 된다.


* 추신: 저는 이 세상에 완벽한 나라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영국보다 못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 가족을 포함해 많은 친구들은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고 저는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저는 단지 제가 추구하는 삶의 기준에 더 부합하는 선택이 한국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브런치에서 쓰는 글들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누군가에게 오해나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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