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좋은 개살구 이야기 - Part 1
영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서 4개의 회사에서 총 7년의 직장 생활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내 삶은 꽤나 좋아 보였던 것 같다. 딱 빛 좋은 개살구처럼.
나는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다. 4학년 졸업 학기에 학과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업계 최고 대기업의 인턴 면접을 보게 되었다. 당시 그 회사는 신입 사원을 뽑지 않던 곳이라 경력직이 아니면 들어가기 어려웠는데, 일부 우리 과 학생들에게 신입으로 입사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면접에 합격하여 운 좋게 첫 인턴을 대기업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인턴 6개월 후 정규직으로 전환이 될 때쯤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서 첫 대졸 신입 공채를 시작했고, 그 덕에 나도 '신입사원 1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기업 신입사원 - 3년
처음은 마냥 좋았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을 확정 지어서 취준 생활이 길지도 않았던 데다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누구보다 행복해하셨던 부모님, 높은 연봉, 회사의 네임 벨류, 대학 내내 꿈꾸던 직무까지 완벽했다. 이제 내 인생에는 이제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다.
인턴 때는 소위 말하는 '잡일'을 하는 데 불만이 없었다. 정규직이 되면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팀의 막내였기 때문에 늘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는데, 내 기준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굳이 필요한가 싶을 정도의 단순 업무들이었다. 물론 당시 나를 좋게 봐주신 팀장님은 내가 주도권을 갖는 프로젝트를 종종 맡겨주시기도 했지만, 결국 팀에서 나의 메인 직무는 '막내'였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이 과연 나의 커리어 성장에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 늘 들었다. 심지어 그 업무들을 쳐내느라 거의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조금만 더 버텨서 승진이라도 하면 상황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우리 팀의 누군가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막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의 업무 범위는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성과 평가 기준이었다.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나는 늘 C였는데 그 이유는 내가 아직 '승진 연차'가 되기 전이어서였다. 팀장님은 내가 일을 못해서 C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늘 강조하시면서 내가 '승진할 때쯤' 고과를 챙겨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잘하나 못하나 똑같은 평가를 받게 될 텐데 뭐 하러 일을 열심히 하나 싶었다. 그렇게 열정 가득했던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점점 그 불씨가 꺼져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출근해서 거의 매일 화장실에서 울었다. 회사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것도 싫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대로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매일 퇴사를 생각했지만 주변에선 내 마음도 모르고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회사가 어디 있냐며 만류했다. 밖은 현실이라고, 나가면 후회한다고. 그래서 버텼다. 버티고 버텨 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속 빈 강정이었다. 업계 최고 대기업에서 3년을 일했지만 부끄럽게도 자신 있게 할 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퇴사를 결심하게 된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방치해 뒀던 방광염이 신장으로 전이가 되어 급성 신우신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하는 일주일 내내, 팀의 선배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상태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막내 일'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회의감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내 미래는 더 이상 없다고 느꼈고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승진과 보너스를 2개월 앞둔 5월의 어느 날, 나는 모두 필요 없다고 말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개인 사업 - 1년
퇴사 이후,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상태여서 다른 곳으로 이직은 하기 싫었고, 마냥 쉬자니 또 마음은 편하지 않아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문득 회사에서 하던 상품 기획, 브랜딩의 경험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으로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
쇼핑몰이라는 레드오션 중에 레드오션을 선택했고, 상품을 구성할 줄만 알지 미리 예산을 관리하는 법이나 마케팅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사실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결말이었다. 무엇보다도 크게 뜻이 없었던 것이 가장 컸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어디 한 달 살기나 하면서 쉴 걸 그랬다.
그래도 덕분에 정말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개인 사업은 정말 확실한 나만의 아이템이 있고,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열정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 때 해야 한다는 것을. 그 당시 나에게 '사업'이라는 선택은 사실 회사에 다시 돌아가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충동성, 도피성 결정이었다. 그렇게 모아놓은 돈, 퇴직금까지 다 바닥을 보이고 나니 이제야 현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계 - 1년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직전 회사 네임 벨류 덕인지 이직은 솔직히 어렵지 않았다. 누구나 알만한 글로벌 브랜드에서 대리 직급으로 최종 오퍼를 받았다. 다만, 직전 연봉을 맞춰줄 수 없다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연봉을 깎아서 입사했다. (* 참고로 이직하면서 연봉이 깎인다는 것은 영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입사 후, 담당 카테고리가 처음 생겼다. 그 브랜드의 전체 여성 컬렉션을 담당했는데, 주어진 예산에 맞추어 상품을 바잉하고 수량을 결정하고, 주도권을 가지고 상품을 기획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일 다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팀에서는 나보다 직급이 낮았던 친구들도 선배들을 단순히 서포트하는 '막내 일'이 아닌 각자 담당 카테고리가 있었다. 그 친구들은 일을 정말 똑 부러지게 잘해서, 같이 일하는 동안 내가 오히려 많이 배웠다. 이 회사가 첫 회사라고 했다. 나와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신입의 모습이었다. 그때 느꼈다. '아! 이런 곳에서 처음 일을 배워야 하는구나.' 첫 회사에서 허비했던 3년이 더 아깝게 느껴졌다. 모두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글로벌 본사와 함께 일을 한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고, 그리고 언젠가는 파리로 출장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것도 설렜다. 무엇보다 드디어 제대로 된 일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내가 1년도 겨우 버티고, 파리 출장도 마다하고 도망가버린 치명적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