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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Jan 22. 2024

명문대 졸업생의 직장 생활 - 2

빛 좋은 개살구 이야기 - Part 2

그곳은 '외국계'라는 탈을 쓴 회사였다.


입사하자마자 전사 2박 3일 워크숍을 갔다. 모든 공식 프로그램이 끝나고 저녁 즈음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새로 입사한 여성 직원들은 대표님 방으로 8시까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인사팀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당시 나 포함 새로 입사한 직원들이 꽤 있었는데 업계 특성상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여성 직원들이었다. 굳이 저렇게 '여성 직원'이라고 짚은 이유가 뭘까 의아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대표님 방에 갔다. 그리고 내 두 눈을 의심했다.


그 방에는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님을 제외하고는 다 여성 직원들이었다. 그분은 이미 술이 꽤나 취한 상태였는데, 옆에서는 계속 술을 따르는 직원이 있었다. 착석하고 나니 신규 입사자들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하기 싫은 의사를 비추니 '분위기를 망친다'라고 핀잔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정말 수치스러웠다. 아무도 이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은 대표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팀장 이상 직급들은 대부분 심각한 '꼰대'였다. 팀장님은 팀원들이 9시 정시에 출근하면 좀 일찍 다니라 했고, 7시에 퇴근이라도 하면 '요즘 일이 없나 봐?'라고 꼭 한소리를 하며 눈치를 주었다. 그래서 아무도 6시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첫 회사에서는 너무 일이 많아서 야근을 했었는데, 여기는 팀장님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하지 못했다. 바쁜 시즌일 때도, 충분히 일을 일찍 끝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않는 팀장님 때문에 새벽 2시까지도 야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직전 회사에서는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성차별이 이곳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리더들은 '젠더 감수성'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작든 크든 성차별 적인 말들을 늘 들어야 했다. 여자는 조신해야 된다, 성격이 착해야 한다, 늘 웃어야 한다, 너는 여자애가 기가 너무 세다 등의 말들 말이다. 같은 팀의 남자 동료에겐 커리어 방향성에 대해 조언해 주면서 나에겐 '넌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라'라고 한 적도 있었다. 당시 '미투(Me too)'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활발했던 시기였는데 이곳에서의 '미투'는 늘 농담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영국에서는 바로 인사팀에 고발이 되고 대부분은 바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여기서도 퇴사를 결심하게 된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디자인팀의 여성 차장님 두 분과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시즌에는 특별히 대표님도 동행하게 되었다. 그분의 만행은 도쿄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일정이 다 끝난 저녁에 일본에 사는 '업계 선배와의 만남'이라는 좋은 포장으로 결국은 본인의 친구를 저녁 자리에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여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술을 따라야 했고 노래방까지 가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분들의 기쁨조가 되어야 했다. 취했다는 핑계로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에 손을 얹는 것도 지켜만 봐야 했다. 새벽 3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차장님이 그러셨다. '그래도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X 같아도 버텨야 돼.'라고. 호텔 방에서 수치스러움에 엉엉 울다가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었다. 버티더라도 이런 곳에서는 단 한시도 버티고 싶지 않았다. 출장을 다녀오고 정확히 일주일 뒤, 퇴사 의사를 밝혔다. 입사한 지 딱 1년이 되던 날이었다.



스타트업 - 10개월

수직적인 회사 분위기와 꼰대들에게 이골이 났던 나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굉장히 신선했다. 대표도 30대였고 팀장을 맡고 있던 사람들도 다 20대 또래였다. 리테일 쪽 사업을 확장시키려던 계획이었어서 나 포함 여러 유통 업계 경력자들을 채용했다. 회사 차원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분야다 보니 모두가 새로운 아이디어에 열려 있었고 나의 결정과 의견을 신뢰했다. 그렇게 첫 편집샵 론칭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팀원들도 직접 고용하고 관리/영업, 마케팅 등 상품 기획 이외의 업무들까지 이전의 회사들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업무들을 맨땅에 헤딩하듯이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주어진 일만 했었다면 여기서는 주체적으로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역할이었고 그게 나에겐 굉장한 동기부여였다. 나는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당시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매출 1위를 달성했고 회사는 이것을 점점 키우기를 원했다. 프로젝트가 점점 커지면서 스타트업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시스템, 리소스 부족'. 업계에서는 당연했던 일들도 여기서는 설득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리테일 사업을 더 키우기 위해서는 '판매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전까지는 수기로 모든 판매를 기록했다.) 상품을 보관하기 위한 물류 창고가 필요하다는 식의 개념이었다. 나는 이런 기본적인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전까지는 사업을 벌이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계속 강조했는데, 당장 투자를 받아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우리 팀은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그리고 경영진들을 설득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때 나의 한계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된 것 같다. 일을 다시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멘토가 필요했다.



대기업 - 1년 6개월

아이러니하게도 돌고 돌아 다시 대기업에 면접을 봤다. 두 곳에서 최종 오퍼를 받았는데, 하나는 첫 번째 회사와 같은 레벨의 경쟁사, 그리고 늘 해왔던 상품 기획 직무였고 두 번째는 훨씬 규모는 작지만 대표님 직속 부서로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더 키워나가는 전략적인 일을 하는 부서였다. 당시 두 번째 회사 대표님이 첫 회사 대기업의 부사장으로 계셨던 분이었는데 업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다. 당시의 나는 간절하게 멘토가 필요했기 때문에 두 번째 옵션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그 대표님은 여타 다른 대기업의 임원과는 조금 다른 분이셨다. 해외에서 오래 지사장으로 계셨던 경험 때문인지 마인드가 한국식과는 정 반대였다. 말로만 '수평적인 구조'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지향하셨고 전사적으로 그 분위기를 이끌어가셨다. 누구든지 할 말이 있으면 대표님 방에 가서 커피챗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덕에 이번에는 정말 재미있고 숨통이 트이는 회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같이 일했던 팀원들은 내가 속했던 그 어떤 팀 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대표님은 이 회사를 '대기업이 하는 스타트업'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공감이 갔다. 스타트업에서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여러 가지 한계로 실행시키기가 어려웠는데, 자본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대기업이었고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는 리더가 있다 보니 실현이 가능했다.


입사한 지 1년이 되던 날, 대표님은 전 직원 상대로 연봉 협상을 하겠다며 본인이 지금 받는 연봉이 성과나 능력에 비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정리해서 메시지를 보내라고 하셨다. 늘 회사에서 주던 연봉만 받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그동안 회사에서 이뤄낸 성과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하나 이유를 정리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결과는 지금 받던 연봉에서 무려 25% 인상. 연봉의 앞자리가 두 번 바뀌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그해 대표님은 거짓말같이 같은 그룹 내 다른 계열사로 발령이 나셨고, 새로운 분이 오시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는 코로나 때문에 회사가 많이 어려워지기도 했고 회사의 수장이 바뀌다 보니 그만큼 변화도 많이 생겼다. 연봉이 올랐지만,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에 실망도 많이 했다. 사실 새로운 발령 소식 전에 고민하던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이미 신청했었지만, 멘토였던 대표님이 다른 곳으로 가신 덕에 더더욱 맘 편히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을 이끌어 주는 리더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다.




명문대 졸업생의 직장 생활. 꽃길이 펼쳐질 것 같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다. 그래도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성격 덕분에 내가 커리어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떤 요소에서 동기 부여를 받는지,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인지, 돌이켜보면 나도 잘 몰랐던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 7년이었다. 이 경험들이 지금 영국에서 직장 생활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대기업, 스타트업, 외국계까지. 다양한 회사에서 온갖 일을 다 겪다 보니 한국의 직장 생활에 더 이상 후회가 없었다. 그래서 더 뒤도 안 돌아보고 미련 없이 영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비슷한 고민으로 이직이나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망설이지 말고 먼저 도전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결과는 성공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결과든, '이전보다 더 나은 나'로 가는 기회가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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