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나의 필연을 따라서
내가 갑작스럽게 서른의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의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도 말이다. 부모님의 첫 반응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였다. 그 정도로 나와 '영국'이라는 나라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미 공식처럼 성립되어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과 같다고 할까?
첫 만남
내가 영국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2년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다. 사실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학부생일 때는 교환학생을 간다고 하면 미국이 대부분의 우선순위였기 때문에 막연히 나도 미국에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교환학생을 지원하게 되면 성적순으로 원하는 학교와 지역을 고를 수 있는 일종의 '번호표'가 부여되었는데, 중간 즈음의 성적이었던 나에게 주어진 '미국 옵션'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나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미국의 좋은 학교들을 다 선택하고 영국이나 유럽에 있는 대학교만 일부 몇 곳 남아있었다. 보통 교환학생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대 학비를 지불하고 비싼 해외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 것이 장점인데, 그 당시 우리 학교와 제휴를 맺은 영국 대학들은 현지 학비에서 감면된 금액으로 교환학생을 모집했었기 때문에 일반 교환학생 프로그램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은 축에 속했다. 우연치 않게도 나의 애매했던 성적 덕에 영국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2012년 9월, 영국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있던 학교는 영국 중부 지역에 있는 노팅엄(Nottingham)이라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이다.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해서 혼자 노팅엄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면서 설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팅엄 대학은 영국에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캠퍼스로 유명한 곳이다. 대학교 2, 3학년을 Pass/Fail 두 가지로 평가받았던 교환학생만의 혜택 덕에 성적에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한몫했었던 것 같다. 경영학 전공으로 왔지만 미술, 영문학 등 다른 전공의 수업도 들어보고 놀기도 많이 놀고 연애도 하고, 정말 잊지 못할 1년을 보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에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늘 영국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지독한 영국 앓이가 시작되었다.
런던, 런던, 런던
런던에 처음 갔을 때 그 감동이 아직도 나에겐 뚜렷이 남아있다. 단순히 '여행 와서 좋다'의 감정을 넘어서 '나도 이곳에서 정착해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치 운명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교환학생을 하는 동안에도 주변 유럽 국가로 여행을 꽤 다녔지만, '여기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런던이 처음이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교환학생 당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남자친구가 졸업 후 런던에서 일을 하게 되어서 롱디를 하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친구를 보러 매년 런던으로 여행을 갔다. 그렇게 2014년부터 2017년 그 친구와 헤어지기 전까지 매년 여름을 런던에서 보냈고, 헤어지고 나서도 런던을 잊지 못해 틈만 나면 런던으로 여행을 갔다. 무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인 2020년 2월까지 말이다. 주변에서는 런던 지겹지도 않냐고 했지만 다른 나라나 도시를 가도 런던만큼 나에게 큰 감동을 준 곳이 없었다. 그렇게 마치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런던이 늘 그리웠고 늘 갈망했다. 옆에서 보다 못한 동생이 '언니는 전생에 영국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기도 했는데, 진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영국을 좋아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사랑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런던에서 좋아하는 스폿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 타워브리지를 제일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편해진다. 런던에 온 지 2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찾게 되는 곳이다. 상징적으로 내가 런던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 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간혹 마음이 힘들 때 나를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20대에 매년 런던에 가게 되면 늘 타워 브리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게 1년, 2년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젠 안 찍으면 서운할 정도로 연례행사가 되었다.
8년 전의 다짐을 지키게 되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막상 실행은 못하고 고민만 하면서 20대를 보냈다. 그러다 만으로 30살이 된 2021년. 이러다가는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마지막 기회였던 7월 하반기 영국 워킹 홀리데이에 지원했고 (그 당시엔 만 30세가 영국 워킹 홀리데이의 마지노선이었다. 지금은 35세까지 상한선이 올라갔다.) 결국 합격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그렇게 꿈꾸던 영국에 가는구나 싶으면서도 '내가 가서 잘할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예전 영국을 여행하던 사진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것에 대한 확신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2014년 23살에 런던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8년 뒤에 난 무조건 여기서 살고 있을 거야!!!!"라는,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만큼 당찬 다짐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당시 23살의 생각으로는, 30대가 되는 8년 뒤에는 막연히 런던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잠깐, 2014년의 8년 뒤면 내년이잖아?'
나는 운명을 어느 정도 믿는 사람인데, 이건 정말 필연이자 런던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정말 완벽한 서사였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정확히 8년 뒤인 2022년 2월, 나는 편도 티켓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