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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Feb 12. 2024

런던에서 백수가 되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서른한 살 취준생

2022년 2월 23일,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영국에 진짜 왔다. 내가 떠날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였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을 보니 내가 한국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늘 여행으로만 오다가 이제 당분간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평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긴장되면서도 행복했고,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이 낯선 땅에서 집도,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


당시 런던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맙게도 내가 정착을 할 때까지 본인의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당장 최소 150만 원 정도 되는 월세를 아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진 모든 자산을 현금화시켜서 들고 왔는데, 런던의 물가를 감안하면 겨우 6개월 정도만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 해외에 나오시려는 분들은 최대한 많이 저축을 해두시길 추천드립니다.... 저처럼 되지 마시고요^.ㅠ) 일단 목표는 그 기간 안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도 한 번도 알바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우선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곳에 에너지 쏟지 말고 오롯이 풀타임 직장을 구하는 데 힘을 쓰기로.


런던 백수의 하루

"런던에 왔으니 시내도 좀 돌아다니고 미술관에 전시도 보러 가고, 가끔은 가까운 유럽 여행도 다녀야지"라는 생각은 슬프게도 나에겐 사치였다. 그렇게 여유 부릴 새도 없이 바로 취준생이 되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 한 일은 헬스장을 등록하는 일이었다. 백수의 가장 큰 장점은 그래도 시간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니까. 다행히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스타일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헬스장을 다녀오고 오후에는 이력서를 쓰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런던에 와서 한국에서 한 번도 하지 않던 러닝도 시작했다. 주변에 공원도 많고 풍경이 예쁘니 달릴 맛이 났다. 답답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엔 템즈 강가를 산책하기도 하고, 가끔은 외식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풀기도 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는 친구, 런던에서 멋진 커리어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얼른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음속 한편에 늘 걱정이 있었지만, 그저 내가 런던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매일 이 아름다운 도시가 내 일상이 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기뻤다.


런던에서는 러닝하다가 집밖에서 산책하는 고양이를 만날 수 있다.
원할 때 마다 하이드 파크나 타워 브릿지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겐 엄청난 혜택이다.


모든 건 다시 원점으로

나는 사실 한국에서의 경력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업계 특성상 높지 않은 연봉 테이블과 나에게 '워라밸'이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런던에서는 그래도 이 정도는 벌어야 살만하겠다' 싶은 목표 연봉이 있었는데 내가 한국에서 계속해왔던 일의 평균 연봉은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내가 일했던 업계는 전 세계적으로 워라밸이 좋지 않은 분야로 유명했고 런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상품 카테고리, 직급, 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들 이외에도 업계 자체에 워낙 잘하고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열정이 없으면 사실 오래 살아남기가 힘든 곳이었다. 내 기준에서 7년이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의 모든것을 뒤로하고 런던에 온 만큼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7년 경력이면 이곳에서는 시니어 매니저나 디렉터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연차이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커리어를 처음부터 다시 빌드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런던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는 오랜 시간 같은 업계나 직무에 있다 보면 다른 분야로 전향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영국에서는 업계나 직무 이동이 꽤 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같이 살던 친구도 마케터에서 회계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여기서 새로 사귀게 된 친구 중에는 백화점에서 세일즈를 하다가 지금은 테크펌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 친구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예시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이 업계 언젠가 꼭 뜨고 만다'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는데 런던에서는 진짜로 그 일이 실현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른한 살 취준생

다들 20대 때 자신의 30대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하곤 한다. 20대의 나는, 서른한 살쯤이면 결혼도 하고 차도 있고 집도 있는 정말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차와 집은커녕 이렇게 런던에서 아무것도 없이 바닥부터 시작하는 외로운 취준생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역시 인생은 이래서 재밌다고 하나보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런던으로 오긴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이력서도 없이 앞으로의 커리어 방향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런던으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은 나조차도 어쩜 이렇게까지 무모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우선 '런던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자'라는 정말 애매한 다짐 하나로 영문 이력서도 처음부터 다시 써나가기 시작했다. 7년 간 내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와, 그래도 나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나의 노력들을 이곳에 있는 누군가는 알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3월 초 즈음, 이력서를 다 마무리하고 링크드인도 업데이트했다. 이제 드디어 런던의 취업 시장에 나를 소개할 일만 남았다. 긴장되고 떨렸다. 런던에서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영어가 모국어도 아니고,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한국에서 일한 경험 밖에 없는 외국인이 영국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요즘은 개발자나 데이터 애널리스트가 잘 나간다고는 하는데... 뼛속까지 문과인 나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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