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들끓었다. 마스크를 쓰고 다행히 입학식에 함께할 수 있었지만 학부모 상담이나 참관 수업 등은 비대면 방식으로 대체됐다. 여름 방학 직전에는 코로나 여파가 급증해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는 날도 많았다. 아이가 어떤 교실에서, 어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지 궁금했고 자주 도서관 얘기를 해줬는데 도서관은 얼마나 재미있게 꾸며져 있을까, 어떤 책들이 있을까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다음 해 아이가 2학년에 되었을 때 처음으로 참관 수업의 기회가 주어졌다.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나서기 좋아했다. 목소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참여하고 싶은 건 꼭 해 보는 아이. 혹시 수업 중에 너무 손을 많이 들거나 발표 기회를 독차지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데 웬걸?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는 너무 얌전했다.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면서도 ‘손 들고 발표 한 번 해보지……’하는 엄마의 욕심이 발동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참여하고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건 내 아이의 몫이 아니었다. 집에서는 엄마 아빠 얘기에 아무 때나 끼어들고 자기주장도 강해 종종 혼나는데 교실 속 너는 너무 낯설잖아…… 그 후 학년이 바뀔 때마다 참관 수업에 가고 있지만 아이는 교실에서 늘 차분하고 얌전했다.
사실 비슷한 경험이 유치원 때도 있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혹여 유치원에서도 새고 있진 않은지 선생님께 조심스레 아이의 생활 태도를 여쭤본 적이 있다. 그런데 늘 칭찬의 말이 돌아왔다. 으레 해주시는 말이겠거니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참 기분 좋다. 그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기억난다. “어린아이들이지만 이곳에서 나름 사회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집에 가면 여기서 참았던 것들을 분출(?)하는 걸 테니 너무 걱정 마셔요.“ 집 밖 세상으로 들어간 아이는 이제 싫어도 먹어 보고, 힘들어도 기다려 봐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다. 사회적 통념을 배워간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온라인상에서 이제는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는지, 어떤 게 싫었는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내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과 마음들. 아이는 집 밖에서도 자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무럭무럭.
*
딸아이가 날 찾지 않는다. 정확히는 나를 ‘덜’ 찾는다. 귀여운 새를 봤다며 하굣길에 영상 통화를 거는 일이나 혼자 걷는 길이 무섭다며 수시로 전화하는 일, 학원 앞으로 데려 와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에게 나는 아침, 저녁을 챙겨주고 머리를 감겨주고(샤워는 혼자 하려고 한다) 조금 멀리 있는 학원은 데려다주는,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그런 존재일까. 아이의 작은 행동 변화에 혹시 나의 말투나 표정이 영향을 끼친 건 아닌지 되돌아본다. 딸이 더 어릴 때 육아하던 습관처럼 변화의 원인을 나에게로 돌린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
육아를 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공감’이었다.(오은영 박사님……그저 빛) 내 엄마로부터 극 F수저를 물려받은 덕분에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는 일은 쉽고 편한 육아법이었다. 특히 공감하는 육아는 아이와 갈등이 발생했을 때 한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아이가 슬플 때, 화낼 때, 짜증 낼 때도 먼저 그 마음에 공감해 주고 천천히 대안을 제안하면 아이는 금방 나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나름 육아 스킬을 쌓아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성향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에만 치중하다 보니 아이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까지 내가 자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 준비하는 게 힘들까 봐 책가방을 매일 싸주었고 제대로 못 씻을까 봐 매번 씻겨 주었고 어둠이 무서울까 봐 매일 옆에서 같이 잤다. 아이 스스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매번 아이의 도전 기회를 박탈시킨 건 나의 두려움이었다. 완벽하지 않을까 봐, 실패할까 봐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나의 약점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공감’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서.
남편은 나와 반대였다. 그래서 육아관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늘 내가 맞다고, 남편을 이겨 먹었던 지난날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남편은 T이기도 하지만 MBTI를 떠나서 아이를 훨씬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과도한 감정 이입과 과잉 추론 없이 아이의 나이 때에 맞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한다. 아이가 아빠와 둘이 놀고 온 날은 늘 새로운 걸 해 본 얼굴이다. 혼자 곤충도 잡아 보고 냇가도 건너 보고. 엄마랑은 가 본 적 없는 오락실이나 PC방도 가 보고 엄마는 절대 사 주지 않을 마라탕 같은 것도 먹어 보고. 아이에게 엄마와 다른 성향의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는 엄마 아빠 없이 친구들과 놀러 나가는 일도 많다. 예전에는 아이의 모든 ‘첫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렇지 못한 상황은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 아쉬움조차 점점 무뎌지는 게 슬프지만 이제는 안다. 부모에게서 한 걸음 멀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두 걸음, 세 걸음……아이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
*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아빠를 마중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아이와 집을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뚜벅이로 가는 길. 3번 환승해야 하는 루트라서 어른인 나도 지치는데 아이는 불평하는 소리 없다. 현장에 도착해 아빠가 결승선을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아침부터 내리던 보슬비가 거세지더니 마라톤 참가자 모두가 비에 흠뻑 젖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기다렸지만 거센 빗줄기와 물웅덩이 탓에 신발과 양말까지 홀딱 젖었다. 겨우 아빠를 만나 차로 돌아왔다. 신발을 벗은 아이 양말도 흠뻑 젖어 있다. 불평 한 마디 없길래 아이의 신발은 안 젖은 줄 알았는데 참고 있던 거구나. 그새 또 자랐네.
딸아이는 발의 촉각이 예민한 편이다. 젖은 양말은 단 몇 초도 참지 못했고 발이 조이는 것도 싫어해 신발은 늘 제 사이즈보다 한 치수 크게 신었다. 우리 집은 물론 친구 집이나 할머니 집에 가서도 문에 들어서면서 양말을 벗어던지는 아이였다. 감각이 예민한 아이를 키우면 공연히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아이는 엄지발가락이 조금만 조이는 신발은 쳐다보지도 않아서 신발을 살 때 늘 앞볼의 형상을 꼼꼼히 체크했다. 까슬까슬한 재질의 옷도 입지 않았고 목이나 손목이 조이는 것도 싫어해서 옷을 고를 때도 특히 재질이나 디테일을 신경 써야 했다. 늘 내게 까다로운 아이였다.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아이. 하지만 누구 탓도 할 수 없었다.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싶은 것만 고집하던 어릴 적 나를 닮아 있다.
언제부턴가 아이의 왼쪽 엄지발가락에 굳은살 같은 흉터가 생겼다. 처음에는 큰 거스러미인 줄 알고 짧게 잘라냈는데 며칠 후 또 단단하게 굳은살이 덮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가 커졌고 발톱 아래 살까지 먹혀 발톱 끝이 들리기 시작했다. 각질이나 거스러미 정도로 여겼는데 병원에 가보니 사마귀였다. 왜 진작 병원에 안 데려왔을까. “신발이나 양말이 작으면 발가락이 서로 마찰되면서 사마귀가 생길 수 있어요.” 어른도 힘든 냉동 치료를 여러 번 받게 해야 했던 미안함보다 그저 예민한 아이라고 치부한 채 실제 발이 얼마나 불편할지 헤아리지 않았던 죄책감이 컸다. ‘양말은 어차피 늘어나니까’라고 생각하고 제때 못 챙긴 것도 후회스러웠다.
가끔씩 싫으면 울고 불편하면 짜증 내던, 날 너무 힘들게 하던 아이가 그립다. 이제는 양말쯤 젖어도 아무렇지 않게 참아내는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힘든 걸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나이가 지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얼마 전 아이와 본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감정에 자리를 내주기 때문에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의 자리가 점점 작아지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면 내가 마음껏 기뻐한 적이 언제였는지, 마음 놓고 슬퍼한 적이 언제였는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가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던 모습도, 때로는 참을성 없이 울던 모습도 한때라는 걸 안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커가고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그래도......너무 참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매주 금요일 연재 중
육아를 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적습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10년 차 엄마의 자아 성찰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