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역사서 중 최고로 손꼽히는 「사기」는 사마천司馬遷이 BC91년에 완성한 역사서입니다. 「사기」는 중국의 오제 시대부터 한 무제 시대까지 약 2000년간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 형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방식은 「사기」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으며 후세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 역사는 각 왕조마다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서가 있습니다. 청나라에 이르러 24개의 역사서를 지정하였는데 매 왕조마다 정사의 으뜸은 「사기」였습니다.
「사기」는 황제의 역사를 다룬 <본기>本紀 12편, 주요 사건의 연대를 기록한 <표>表 10편, 당대의 풍속과 제도를 다룬 <서>書 8편, 제후들의 일대기를 다룬 <세가>世家 30편, 그리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과 이민족의 역사까지 다룬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52만 6,500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마천은 글자 수까지 밝히면서 자신의 저술에 어떠한 수정도 원하지 않았지만 후세 역사가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조금씩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사마천이 관직에 있던 그 당시에 한나라는 흉노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패배한 한나라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무제武帝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하려 했습니다. 그때 사마천은 이릉의 죄를 용서하고 나중에 나라를 위해 보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고 변호했습니다. 평소 사마천은 이릉 장군과는 아무런 친분이 없지만 평소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무제는 크게 분노했고, 사마천을 극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극형에 처한 사마천은 사형,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 성기를 제거하는 궁형 이렇게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극형에 처한 사람들 중 부유한 사람들은 벌금을 선택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형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궁형을 받으면 회복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고, 살아 있어도 너무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역사서를 완성해 달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치욕을 감내하고 궁형을 받았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후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라며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열전 첫 편인 <백이 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어, 늘 좋은 사람을 돕는다.”
하지만 백이나 숙제는 인덕을 쌓고 착하게 행동했으니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굶어 죽었다. 그리고 공자는 70명 제자들 중 안연이 배움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안연은 평생 빈곤하게 살았고, 술지게미 같은 음식도 마다하지 않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지만 도척이라는 사람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르는 것인가? 이런 사례들은 매우 많다.
요즘에도 행동이 도를 벗어나고 오로지 금기시하는 일만 저지르고도 평생토록 즐겁게 살고 부귀가 대대로 끊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땅을 골라서 밟고, 때를 봐가며 말을 하고,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정하지 않아도 참고 분을 터뜨리지 않았는데도 재앙을 만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몹시 곤혹스럽다. 이른바 하늘의 도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백이 열전-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사마천 본인도 억울하게 궁형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벌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원망하는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역사가의 길을 걷겠다고 아래와 같이 밝힙니다.
백이와 숙제가 비록 어진 사람들이긴 했지만 공자가 그들을 언급해서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안연이 공부에 독실하긴 했지만 공자를 통해 그 행동이 더욱 뚜렷해졌다. 동굴이나 바위에서 숨어 사는 선비들은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지만 그 훌륭한 명성은 연기처럼 사라져 입에 오르지 않았으니 서글프구나!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 중에 덕행을 갈고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도 지고한 선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찌 후세에 명성을 남길 수 있겠는가?
-백이 열전-
사마천은 자신의 붓으로 세상에서 억압받고 잊힌 인물들을 발굴하여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후세에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황제와 신하, 영웅과 권세가와 같은 기존에 다뤘던 역사 인물뿐만 아니라 상인과 농사꾼, 심지어 자객과 도굴꾼까지 모든 종류의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사기」를 통해 인간 본연의 모습과 사회 현상 등 모든 것에 대해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는 완성된 이후 2000년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책이라는 난서亂嶼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본기>의 전반부는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신화나 설화로 평가되었고, 「사기」의 다른 이야기는 군주를 비판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마천 본인도 「사기」가 훼손될 까 두려워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한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경제와 자신의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효경 본기>와 <효무 본기>를 폐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사기」는 그것이 완성된 전한 시대 때부터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소외된 채 몇 세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기」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당나라 때에는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상(은) 나라 유적과 진시황릉이 발굴되면서 「사기」에 대한 신뢰성이 입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책이 아닌 세상을 밝히는 책으로 「사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사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점점 사라지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위대한 역사 고전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