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출신이 불분명합니다. 「사기」의 <진시황 본기>에는 장양왕莊襄王의 후손이라고 언급하지만 「사기」의 <여불위 열전>에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진시황의 출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통일 이후 진나라의 역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는 상호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 인질을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질은 중요도에 따라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진시황의 아버지인 자초子楚(훗날 장양왕)는 어린 시절 조나라에 인질로 갔습니다. 진나라 왕자 안국군(훗날 효문왕)의 서자庶子인 자초는 중요도가 낮았기 때문에 가난과 고통으로 인질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라의 부자 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자초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막대한 돈을 지원하여 그를 왕위에 앉히려 하였습니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자초는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국군은 자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국군의 정실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은 안국군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양부인은 항상 근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안국군이 죽고 나면 자신의 처지가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불위는 이 틈을 노려 막대한 자금으로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리고 안국군이 죽은 이후에도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자초를 양자로 삼아야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화양부인은 자초를 양자로 삼고 자초는 안국군의 후계자가 됩니다.
<여불위 열전>에 따르면 자초는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애첩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초는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요청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합니다. 이후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자 자초는 자연스럽게 태자가 됩니다. 그런데 안국군은 재위에 오른 뒤 몇 년 후 죽게 되고, 자초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자초도 즉위 3년 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영정(훗날 진시황)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하여 여불위는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작은아버지를 뜻하는 중부仲父로 불리며 막강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장양왕의 아내이자 진시황의 어머니인 태후의 욕정으로 인해 여불위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장양왕이 죽은 뒤 태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여불위는 진시황이 성장하면서 불안에 휩싸입니다. 진시황이 자신과 태후와의 관계를 알아차리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남근으로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노애嫪毐라는 남자를 내시로 변장시켜 태후에게 소개합니다. 태후는 노애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고, 결국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리고 진시황에 의해 태후와 노애의 행각이 발각되자 노애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반란은 결국 진시황에 의해 진압되고 노애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때 진시황은 여불위에게도 책임을 물어 자결을 명합니다. 이 사건 이후 진시황은 진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합니다.
진시황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입니다. 그는 중국의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각종 제도 및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군현제를 실시하여 진나라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주나라가 실시한 봉건 제도와 달리 군현제는 군주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제도인데 왕권이 약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제도였습니다. 그만큼 진시황의 힘이 강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다스린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합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치러진 끊임없는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은 진나라의 통일 이후 안정된 삶을 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만리장성과 아방궁 건설 등 힘든 노역은 끊이지 않았고, 통일 이전보다 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황제 호혜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와 함께 폭정과 만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항우項羽가 진나라의 세 번째 군주 자영子嬰을 죽이면서 진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